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간부들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2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정대협 교육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가 한일협정에 포함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일 배상청구권 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정대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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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서 꼼꼼히 보니
“한-일 협정에는 식민지 지배의 책임과 반성, 사죄에 대한 조문이 일절 없었다. 이처럼 지난날의 문제를 말끔히 청산하지 못한 채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은 계속됐다.” 최근 한·중·일 세 나라 학자들이 공동으로 펴낸 역사교재 <미래를 여는 역사>는 한-일 협정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한-일 협정이 과거를 털지 못함으로써 미래를 열지 못했다는 냉정한 평가다. 정부가 26일 공개한 한-일 협정 문서는 이런 평가가 객관적인 근거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간 한-일 협정과 관련해선 ‘굴욕외교’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매몰시킨 정치적 결탁’ ‘미국의 동북아 반공 교두보 구축’이라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물론, 일각에선 한국의 경제발전, 동북아 질서 안정 등을 들어 반론을 펴기도 했다. 이런 논란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선지 외교부 당국자들도 “이번 문서 공개를 통해 한-일 협정의 실상을 국민들이 알게 될 것”이라며 “평가 역시 국민들의 몫”이라고 말하고 있다. 끊이지 않는 ‘굴욕외교’ 논란에 일단 마침표 사실상 한·미·일 협정… 남북 분단 고착 주범 이번 문서 공개는 그간 제기됐던 숱한 논란에 마침표를 찍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1962년 10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상의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는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이라는 내용과 함께 당시 두 나라의 정치적 타결의 실체를 보여준다. 일본이 회담 내내 독도 문제를 제기했으며, 한국은 이에 결렬을 각오하고 결연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도 확인된다.사실 한-일 협정은 ‘태생적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 한국은 1951년 8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서명국 자격을 얻지 못함으로써 일본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상실했다. 결국 강화조약 4조 비(B)항의 “일본은 한국에서 미 군정 또는 그 지령에 의한 일본 국민의 재산 처리의 효력을 승인한다”는 규정에 따라 청구권 협상을 벌여야 했다. 이나마도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경제협력 자금’이라는 명목이 포함된 5억달러를 받아내는 데 그쳤다. 더욱이 한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것을 기본관계 조약에 명기하기 위해 큰 대가를 치렀다. 한-일 합방이 원천무효임을 명시하지 못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통치를 합법화할 수 있는 빌미를 줬다. 이런 뼈아픈 허점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를 비롯해 독도 문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등 이른바 ‘과거사 문제’의 뿌리가 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한-일 협정은 사실상 한-미-일 협정이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구도가 고착하자 동북아에 반공 교두보를 구축한다는 차원에서 한국과 일본이 결속할 것을 강하게 희망했다. 여기에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의 경제적 요구와 부채를 털어내려는 일본의 정치적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한-일 협정의 결과를 이렇게 평가한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과 일본 모두 동아시아 냉전 체제 아래에서 미국과 삼각동맹 관계를 형성했다. 이는 북한을 더욱 소외시켜 남북분단을 더욱 고착시켰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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