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9일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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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향기
문제 하나. 옛 조선시대에 왕명을 받들어 전국의 탐관오리들을 벌벌 떨게 했던 암행어사들은 말과 역졸을 동원할 수 있는 신분증인 마패(馬牌)와 아울러, 유척(鍮尺)이라는 물건을 반드시 지니고 다녔다. 이 물건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문제 둘. 지하철을 이용하는 서울 시민들이 자주 겪는 일이지만, 1호선 서울역과 남영역 사이, 4호선 남태령역과 선바위역 사이를 지나는 전동차는 몇 개의 전등을 제외한 모든 전원이 꺼진 상태로 운행되다가 잠시 후에 전원이 다시 들어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 셋. 화성 궤도를 돌며 탐사를 벌이기 위하여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발사한 화성 기후 탐사선(Mars Climate Orbiter)이 1999년 9월 화성의 궤도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하고 대기 중에서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다. 사고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위의 세 가지는 얼핏 보기에 전혀 관련이 없는, 매우 생뚱맞은 질문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표준’과 관련됐다는 것이다.조선시대에 임금의 밀지를 받아 지방 수령들의 부정부패 등을 감시하던 암행어사가 항상 가지고 다녔던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이다. 암행어사들은 고을의 수령이 세금 징수 등에서 백성을 속이는지, 또는 형벌을 내리는데 사용되는 형구가 규격에 맞는지 유척으로 측정을 하였던 것이다. 즉 유척은 조선시대의 도량형 제도에서 ‘길이의 표준’으로 사용되던 도구라고 볼 수 있다. 서울의 지하철 일부 구간에서 전동차들이 전원을 끄고 관성을 이용하여 달리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이유는, 한국철도공사(옛 철도청)가 운영하는 곳과 서울지하철공사가 운영하는 곳에서 전력 공급을 위한 기술 표준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한국철도공사 구역에서는 25,000V의 교류 전원을 사용하는 반면에, 서울지하철공사 구역에서는 1,500V의 직류 전원을 사용하기 때문에, 두 구역 사이의 ‘마의 구간’에서는 잠시 전원을 끌 수밖에 없다. 화성 기후 탐사선이 화성의 궤도 진입 시에 폭발한 것 역시 표준과 큰 관련이 있다. 사고 원인이 우주선 제작진과 조종팀이 미터계(meter)와 인치계(inch)로 각기 다른 표준을 생각하고 계산착오를 일으켰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도량형과 기술의 표준을 통일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직접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 및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현재 도량형의 세계 표준으로 쓰이는 미터법은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파리과학아카데미가 정부의 위탁을 받아서 만든 것으로서, 지구 자오선 길이의 4천만분의 1을 ‘1m’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부피와 질량의 표준도 정한 것이다. 이는 1875년에 국제적인 미터조약에 의하여 국제통일 단위계(SI)로 인정되었고, 오늘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지구 자오선의 길이와 자전 주기도 오랜 세월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기 때문에, 지금은 지구를 기준으로 정했던 종래의 방식에서 벗어나 특정 원소가 방출하는 빛의 파장과 진동수 등을 기준으로 하여 길이와 시간의 표준 단위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도량형의 통일이 국제적으로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에서는 아직도 미터법 대신에 길이를 야드(yd), 피트(ft), 인치(in), 마일(mile), 질량을 파운드(lb), 온스(oz) 등으로 표기하는 야드-파운드 법(yard-pound system)을 많이 쓰고 있다. 아무래도 기존의 관습과 국가적 자존심 등이 얽힌 듯한데, 앞서 언급된 대로 표준단위 착각으로 인해 1억 달러가 훨씬 넘는 화성 기후 탐사선을 잃어버리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유사한 사고가 되풀이됨에 따라, 최근에는 미국 등지에서도 미터법을 대대적으로 사용하자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새로운 제품이나 기술의 표준을 정할 때에도 각국의 이해관계 등이 엇갈리는 바람에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표준과 단일 체계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이제 디지털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될 몇 년 후에는 퇴장하겠지만, 현행 아날로그 텔레비전의 기술 표준이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과 우리나라 등이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는 NTSC(National Television Systems Committee) 방식은 텔레비전 산업이 발달하던 초기인 1953년 당시, 미국에서 난립하던 다른 기술방식들을 누르고 미국 라디오회사(RCA)의 방식을 바탕으로 정립된 것으로서, 흑백과 컬러 텔레비전이 호환되는 편리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1956년 프랑스에서는 SECAM(Sequentiel Couleur Memoire) 방식이 제안되고, 1962년에는 독일에서 PAL(Phase Alternance Line) 방식이 새로 등장하여 세계의 아날로그 텔레비전 시스템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 3개의 표준으로 분할되는 체제가 지속되어 왔다. 디지털 텔레비전과 이동통신의 국제 표준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구상 어디에서나 통화 가능한’ 전세계 단일통신망을 목표로 하여 예전에 기대를 모았던 IMT-2000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미국의 동기식과 유럽의 비동기식으로 기술 표준방식이 나뉘어 대립되었던 것도 주요 원인의 하나로 꼽힌다. 통신의 기술 표준은 경제적 이해관계 뿐 아니라 안보, 군사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세계 모든 나라가 ‘로밍이 필요 없는’ 단일 통신망 체계를 이루는 것은 쉽게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온갖 첨단기술과 차세대 기술들이 부단히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기술들이 차세대 국제 표준의 일부로 채택되는 경우도 있는데, 연구개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 못지 않게 정부 차원에서 국가적 표준의 확립과 세계 시장에서의 표준 선점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글: 최성우 – 한국과학기술인연합 운영위원)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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