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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04 17:13 수정 : 2005.01.04 17:13

갑자기 꽁꽁 모든 게 얼어붙었다. 물기가 있었는지 개밥그릇도 땅바닥에 얼어붙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종종걸음을 치며 마당을 왔다갔다 하는데 옆집 할아버지가 부르신다. 시금치 좀 뽑아 가란다. 엊그제는 김장하고 남은 배추를 쌈 싸 먹으라고 뽑아 주시더니 오늘은 시금치다. 혼자 드시는 것보다 나누어 주는 게 더 많은 늘보 영감님네 텃밭 농사다. 뭐든지 “천천히 하지 뭐”가 그분의 대답이라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래선지 텃밭에 채소가 가장 오래 남아 있어서 오히려 이웃들에게 가장 늦게까지 싱싱한 노지 채소를 먹여주신다.

이제 날씨가 더 추워지면 비닐을 덮어도 누런 잎이 많이 생길 테니 더 얼기 전에 솎아내고 작은 것들만 두고 짚과 비닐을 덮으면 내년 봄쯤 다시 먹을 수 있다. 그동안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아주 잘 자랐다. 도톰하고 파릇한 잎이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된장을 연하게 풀어 시금치 국을 끓여 먹어야지.

남쪽지방에는 한겨울 눈발이 날려도 시금치가 있었다. 우리 집 텃밭 가운데 가장 양지쪽에는 짚으로 덮인 시금치가 겨울에도 파릇파릇하게 살아 있었다. 김장이 끝나고, 한 참 먹던 겉절이 김치며, 김장 속도 좀 물리고 콩나물 국, 김치찌개, 시레기 국 말고 다른 게 없을까 하고 슬슬 눈을 돌릴 무렵, 아버지가 깔아 놓은 짚 풀 밑에 싱싱한 겨울야채 시금치가 가끔씩 우리 입맛을 돋우어주었다.

요즘은 모든 채소가 시도 때도 없지만 그래도 시금치는 겨울이 되어야 제 맛이 난다. 추울 때 먹는 시금치는 그 맛이 들쩍지근하면서도 된장국물과 아주 잘 어울린다. 또 분홍빛 뿌리까지 살살 다듬어 살짝 데쳐서 소금 간을 하고 다진 마늘과 참깨소금에 버무린 시금치 무침 한 그릇은 묵은 나물에 질린 입들이 밥상에 놓기가 무섭게 달려들어 거덜 낼 정도로 맛있다. 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금치를 익혀 먹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간장 양념에 생 무침을 해도 먹을 만하다. 좀 익숙하지 않아서 맛이 이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말끔히 접어도 될 만큼 맛있다.

야채와는 달리 뿌리째 먹는 시금치를 욕심껏 한 소쿠리 얻어 왔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잘 키우셨던지 떼어 낼 것 하나 없이 싱싱하다. 봄에 담은 새 된장을 한 종지 떠왔다. 멸치와 다시마, 말린 표고버섯 한 장을 넣고 국물을 우려낸 뒤 시금치를 넣고 된장을 풀었다. ‘음, 구수한 냄새….’ 글 오진희/동화작가, 삽화/신영식 환경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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