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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18 07:02 수정 : 2017.12.18 10:51

전남 여수시 율촌면의 한 주민이 2013년 6월11일 마을에 내린 ‘검은 비’가 밭작물에 남긴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국립환경과학원은 이때 처음으로 안정동위원소 존재비 분석을 활용해 인근 공단의 한 업체 매립장을 발생원으로 지목했다. 이 분석 결과는 법적 증거로까지 채택되지는 못했지만, 환경과학원이 안정동위원소비 분석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이듬해부터 동위원소비 연구기반 구축을 위한 로드맵을 추진하는 계기가 됐다. 연합뉴스

[미래&과학]
방사성동위원소와 달리 붕괴 안해
물질 기원 밝힐 ‘화학적 지문’ 역할
범죄수사·환경오염원 규명에 유용

벌꿀 검사선 공식 분석법으로 정착
운동선수 도핑 테스트서도 활용중
전문가 “만능은 아니나 가치 커져
대조군 라이브러리 구축이 중요”

전남 여수시 율촌면의 한 주민이 2013년 6월11일 마을에 내린 ‘검은 비’가 밭작물에 남긴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국립환경과학원은 이때 처음으로 안정동위원소 존재비 분석을 활용해 인근 공단의 한 업체 매립장을 발생원으로 지목했다. 이 분석 결과는 법적 증거로까지 채택되지는 못했지만, 환경과학원이 안정동위원소비 분석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이듬해부터 동위원소비 연구기반 구축을 위한 로드맵을 추진하는 계기가 됐다. 연합뉴스
60여종의 동위원소 가운데 방사선을 방출하며 계속 붕괴하는 방사성동위원소와 달리 안정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안정동위원소’다. 탄소(C)를 예로 들면, 자연계에는 양성자와 중성자 수가 똑같이 6개인 탄소 원소가 대부분이지만 중성자가 한두 개 더 많은 것도 미량 발견된다. 탄소는 자연 상태에서 질량수가 12, 13, 14인 세 가지 동위원소로 존재하는 셈이다. 이 가운데 질량수가 12인 탄소(¹²C)와 13인 탄소(¹³C)가 안정동위원소, 질량수 14인 탄소(¹⁴C)가 방사성동위원소다.

방사성동위원소가 암 치료 이야기나 눈길 끄는 고고학적 발견과 함께 종종 언급되면서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데 반해 안정동위원소는 조명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 주로 지질이나 해양, 환경 분야 등의 지구화학 연구실에서만 연구 대상 물질의 기원을 찾아내는 방법론으로 안정동위원소가 존재하는 비율인 ‘안정동위원소비’ 변화 특성에 주목해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랫동안 과학자들의 연구논문 속에만 머물던 안정동위원소가 최근 들어 범죄 수사, 농수산물 검사, 환경오염 사고 원인 규명 등 현실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원소별로 고유한 안정동위원소비는 물리·화학적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변화한다. 탄소 안정동위원소는 ¹²C가 98.9%, ¹³C가 1.1%의 비율로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정밀한 질량분석기(MS)를 이용해 실제 확인해보면 돼지고기 속 탄소냐 쇠고기 속 탄소냐에 따라 다른 것은 물론, 같은 쇠고기 안에서도 호주산이냐 미국산이냐에 따라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이들을 살찌운 사료와 사육된 환경 속 탄소의 안정동위원소비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안정동위원소비 변화 특성 때문에 동위원소비 질량분석기(IRMS)로 조사 대상 시료들을 구성하는 원소의 안정동위원소비를 측정하면 두 시료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알 수 있고, 표준시료의 안정동위원소비와 대조하면 조사 대상 시료가 거쳐온 과거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자료: 신경훈 교수 제공

광주과학기술원 지구환경공학부 강창근 교수는 “안정동위원소비 분석을 하면 동해 바다 밑 유기물이 낙동강을 통해 유입된 육상 기원 물질인지, 러시아에서 버린 폐기물에서 나온 것인지, 자연 속 고유물질인지도 알 수 있다. 안정동위원소비 분석은 물질의 기원을 찾기 위해 과학계에서 쓰는 추적자 중에서 제일 앞서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안정동위원소비가 ‘화학적 지문’으로 불리는 이유다.

2013년 6월 어느 날 저녁 전남 여수시 율촌면 일부 지역에 검은색 비가 내렸다. 이 검은 비 사고의 원인 규명에 나선 국립환경과학원은 그때까지 연구해오던 안정동위원소비 분석법을 처음 시도했다. 의욕적인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환경과학원은 비에 섞여 피해지역에 떨어진 분진과 인근 산업단지에서 채취한 분진 속 탄소와 질소의 안정동위원소비를 분석해 한 업체의 매립장을 발생원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 분석 결과를 전달받고도 증거 불충분으로 해당 업체를 무혐의 처분했다. 법원도 이 업체가 환경청을 상대로 낸 행정소송에서 증거가 부족하다며 업체의 손을 들어줬다. 비록 법적 증거로 인정받는 데는 실패했지만 안정동위원소비 분석이 점점 다양해지는 오염사고 원인 규명의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한 환경과학원은 2014년부터 이 부문 연구기반 구축을 위한 로드맵을 짜 추진해오고 있다.

환경과학원은 이후 최근까지 대구 안심연료단지가 주변 공기질에 끼친 영향 조사, 동해 시멘트공장 분진 피해 조사 등으로 안정동위원소비 분석 적용 사례를 늘리며 분석 기법을 가다듬어왔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시작 단계일 뿐이라는 것이 내부 평가다. 최종우 환경과학원 환경측정분석센터장은 “환경 분야 안정동위원소비 분석은 아직 공정시험기준도 없어 지금 준비 중에 있고, 시범 케이스로 여기저기 적용해보면서 맞는지 안 맞는지 검증하는 단계로 보면 된다”며 “과학수사에서 유전자 분석이 자리잡는 데 20년 이상 걸렸는데, 이쪽도 그렇게 봐주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시판되는 한 벌꿀의 용기 표면에 탄소 안정동위원소 존재비가 표시돼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식품 규격은 탄소 동위원소비가 표준 시료의 -22.5퍼밀(천분율)을 초과하는 벌꿀은 벌에게 설탕을 먹여 만든 사양벌꿀로 분류한다. 김정수 기자
환경과학원보다 먼저 안정동위원소의 화학적 지문 활용에 주목한 것은 지문과 유전자 분석의 한계를 절감해온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다. 국과수는 이미 2010년 말 화제가 됐던 이른바 ‘쥐식빵 사건’을 쥐식빵 속의 제빵 재료와 제보한 빵집 제빵 재료의 탄소 안정동위원소비를 대조해 제보자의 자작극임을 밝혀내는 데 성공한 바 있다. 국과수는 이후 계속 안정동위원소비 분석을 적용하며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유전자 채취가 불가능한 백골 상태 시신에 남아 있는 머리카락이나 치아, 뼈 속의 스트론튬(Sr) 동위원소비로 시신의 거주지와 이력 정보를 추적하는 체계를 구축한다는 목표까지 세워놓았다.

인삼이나 어류 같은 농수산물 원산지 추적도 안정동위원소비 활용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주목받아온 분야다. 이미 안정동위원소비 분석이 공식 시험법으로 채택된 경우도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벌꿀 식품규격은 탄소 안정동위원소비를 일반 꿀과 설탕을 먹인 사양 벌꿀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고, 용기에 벌꿀 표준시료와의 동위원소비 차이를 표기하도록 하고 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관심이 높아진 도핑테스트에도 안정동위원소비 분석은 활용되고 있다. 신경훈 한양대 해양융합공학과 교수는 “운동선수들이 근육강화제로 쓰는 스테로이드는 체내에도 원래 있는 물질이어서 사람마다 농도 차이가 있다. 이 농도가 어중간하면 선천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탄소 안정동위원소비를 분석하면 약물으로 주입된 것과 선천적인 것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질소 안정동위원소 존재비 분석을 활용한 질소 순환과 기원 추정 신경훈 교수 제공

안정동위원소비를 측정하기 위한 동위원소 질량분석(IRMS) 관련 장비들 신경훈 교수 제공
안정동위원소비 분석법을 연구해온 전문가들은 안정동위원소비가 만능열쇠가 될 수는 없지만 갈수록 화학적 지문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양한 안정동위원소비 분석 사례가 쌓인 안정동위원소비 라이브러리가 구축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신 교수는 “안정동위원소비 분석을 해도 대조할 동위원소비 라이브러리가 없으면 결과를 바로 해석할 수 없다. 그러면 매번 배경 시료를 다 채취해서 분석해야 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정확도도 떨어질 수 있다. 전문 인력이 꾸준히 분석 데이터를 축적해 풍부한 라이브러리를 구축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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