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유튜브 채널 ‘위라클’ 진행 박위씨
한껏 들뜬 날이었다. 인턴으로 일했던 의류회사에서 정규직 전환 소식을 받고, 정식 출근을 일주일 가량 앞두고 있었다. 스물일곱살 청년 박위씨는 ‘취업턱’을 내겠다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파티는 요란했다. 과음을 했고 필름이 끊겼다. 눈을 뜨니 중환자실이었다. 쇄골뼈 밑으로 감각이 없었다. 일곱 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난 뒤 의사는 말했다. “손가락도 움직이기 힘들 겁니다.” 사고 순간을 포착한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은 없었지만 모든 정황은 낙상을 가리켰다. 술에 취해 건물 2층 높이에서 떨어진 것이다. 2014년 5월, 인생의 정점에서 박씨는 그렇게 추락했다. 5년 전 정규직 ‘취업턱’ 과음해 추락‘경추 골절로 척수신경 완전 손상’
2년간 재활 혼자 휠체어타기 ‘성공’ “홀로 집에만 있을 장애인들 생각나”
2월 유튜브로 ‘휠체어 생활법’ 공유
“여행 프로그램 진행자 되는 게 꿈” “몸이 보이기는 하는데 몸이 없어진 느낌이었어요.” ‘경추 6·7번 골절로 인한 척수 신경 완전 손상’, 의사의 진단명이었다. 2주 뒤 손가락이 중력을 이기고 ‘까딱’했다. 그가 경험한 첫 기적이었다. 기적은 더디게 찾아왔다. 그뒤로 두 달 동안 누워만 있었다. 욕창이 생길까봐 두 시간에 한 번씩 뒤집히기를 반복했다. 중학교 때 축구선수를 했고, 고등학교 때 전교 ‘체육부장’을 했던 박씨였지만 그때는 “남들이 앉아 있는 것, 숟가락을 드는 게 다 기적처럼 보였다”고 했다. “꼼짝하지 않는 몸을 움직이는 건 마치 머리카락에 힘주는 것과 같았어요.” 겨우 앉을 수 있게 되자 재활 훈련이 시작됐다. 가족과 친구들이 그의 곁을 지켰다. “교회 친구, 동네 친구들이 함께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야간 간병조를 짰고 매일 밤 곁에 있어줬어요. 병문안 하려면 복도에서 2~3시간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많은 분이 응원하러 와줬고요. 그런 분들의 존재 자체가 힘이 됐죠. (회복이 더뎌) 짜증 날 때도 있었지만 좋아지는 것에 집중했어요. 다시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요.” 팔이 2kg 무게를 들어 올릴 힘이 생기자 그는 휠체어에 앉았다. 그리고 한강에 나갔다. “혼자서 살아 남으려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늘려나가야죠. 처음엔 엄마가 위험하다고 만류했어요. 엄마한테 저는 ‘서른 살짜리 아기’인 셈이니까요.” 첫날은 10m에서 멈췄지만 조금씩 거리를 늘려나갔다. 그는 “마치 게임에서 스테이지 깨듯이 성공 경험을 쌓아갔다”고 했다. 체온조절 기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온 몸에 핫팩을 붙인 채 홀로 나간 날도 많다. 그렇게 2년을 훈련하자 혼자서 약 11㎞를 휠체어로 달릴 수 있게 됐다. 혼자 집 밖을 나설 수 있게 되자 그는 자신처럼 홀로 집에 있을 장애인들이 눈에 밟혔다. “다치고 나니까 새로운 세상이 보였어요. 다친 사람이 너무 많은데 길에선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다들 집에 있는 거죠. (다친 사람들에겐) 모든 게, 하다못해 5㎝ 턱도 장벽이거든요. 그게 가슴이 아팠어요.” ‘내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긴 고민 끝에 찾은 답은 유튜브였다. 그는 지난 2월 채널 <위라클>을 열고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데는 ‘함께 살아보는 것’ 만큼 효과적인 게 없어요. 실제로 제가 다친 뒤 친구들이 달라지는 게 보이더라고요. 친구들이 먼저 ‘거긴 경사로가 있어서 나중에 같이 가면 좋겠더라’라고 말하는 식이죠. 그렇다고 제가 모든 장애인들과 함께 살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시간·공간 제약 없이 영상으로 같이 살면 되겠구나 싶었어요. 그게 유튜브였죠.”
채널 <위라클>을 운영하고 있는 박위씨. 사진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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