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작은 설(亞歲), 태양신을 숭배하던 문화권에서는 새해의 시작이었던 동지(冬至)가 머지않다.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여름 단오날에는 부채를 겨울 동짓날엔 달력을 선물하는 미풍양속이다. 내년을 계획하라는 뜻이다. 동짓날 대표 시절음식은 동지팥죽. 속설에는 중국 요순시대 공공씨의 아들이 동짓날 죽어서 천연두를 관장하는 역귀(疫鬼)가 되었는데, 어릴 적 팥을 싫어했다하여 팥죽을 쑤어 먹고 주변에 뿌리기도 하여 돌림병을 예방하는 벽사가 되었다고 한다.
동지 팥죽
전설따라 삼천리같은 얘기다. 좀 더 수준을 높여 볼 수는 없을까. 가장 먼저 드는 의문.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 왜 하필이면 팥죽일까. 복선으로 감추어진 온갖 비밀을 풀어내는 음양학에선 동지를 음기운이 세력의 끝에 도달했다하여 음지(陰至)라 한다. 반대로 그동안 맥없이 짜부라지던 양기운은 동지를 기점으로 비로소 다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태양의 부활이다. 양의 기운이 비록 미약해서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음양의 세대교체다. 하늘의 기운변화가 이러한데 사람에게 영향이 없겠는가. 이 시점에서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맞춤형 곡물이 바로 팥이다. 팥의 성질은 음양이 아울러 평하고 맛은 달고 시다.
붉은 색은 오행에서 화(火) 단 맛은 토(土) 신 맛은 목(木)이다. 목극토라 신 맛은 단 맛을 극(克)하나 절묘하게도 목생화·화생토라 껍질의 쓴 맛 즉 화가 이를 조화시킨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주 조심스럽게 양기운의 우세를 예견하는 형국이다. 천지기운과 딱 맞아 떨어진다. 팥죽을 먹어 우리 몸이 계절기운의 변화에 적응하도록 준비시키는 거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올 해는 동지가 일찍 동짓달 상순에 드는 애기동지(兒冬至).
팥
우리민족은 태음력과 태양력을 아우른 태음태양력으로 24절기풍속을 형성시켜온 지혜로운 민족이다. 음력과 양력 그 차이를 감안해 동지를 구분했다. 애기동지란 태양이 황경 270도에 위치했으나 기운으로는 음의 세력이 아직 끝이 아닌 시점. 그래서 팥죽 대신 팥시루떡을 먹도록 했다. 이건 또 뭔가. 여기에는 또다른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바로 팥의 조리법이다. 팥죽은 팥을 완전히 삶아 으깨고 체에 걸러 껍질을 제거하고 그 물에다 찹쌀로 만든 새알심을 보태 쑨 죽이다. 반면에 팥시루떡에 들어가는 팥은 완전히 으깨지 않는다. 부연하면 팥죽은 팥껍질을 완전히 터트려서 만들고 시루떡에 들어가는 팥은 일부만 터지고 껍질도 남아있다. 따라서 애기동지에는 팥껍질을 완전히 터트리지 않아 양기운을 조금 더 남기는 조리법을 사용한 팥시루떡을 먹는 것이다.
새알심
이런 조리법은 산에 사는 사람(仙)들에게만 전해오는 비술인 연단술(鍊丹術)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본격 수행에 들기 전에 정력과 기력을 강화시키는 비법인 지단술(地丹術)에서 여름에는 냉성(冷性)인 녹두를 먹는다. 바로 이 녹두조리법에서 양체질은 껍질을 반만 터트리고 음체질은 껍질을 완전히 터트리는 것은 물론 음기운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해 팥을 섞는다. 음양이 반대지만 원리는 같다.
천지자연의 기운을 꿰뚫어보신 소수 엘리트할아버지들의 혜안이 풀뿌리에 불과한 민간에 알려준 삶의 지혜가 미풍양속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는 사실, 가슴속에서 전율이 인다.
김인곤(수람기문 문주)동영상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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