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인물] 평생 응급의학 외길 삶 살아온 의사 “윤한덕 없이는 일이 돌아가지 않았다”
윤한덕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
1993년 25살 윤한덕은 전남대 응급의학과를 졸업했다. 응급의학과가 막 생길 때였다. 때마침이라고 해야 할까. 1990년대 중반 대한민국은 곳곳에서 붕괴했다. 1994년 성수대교가 내려앉았고,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가 났다.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 현장이 폭발했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응급실을 지키던 레지던트 윤한덕은 절망했다. ‘평생의 동료’인 허탁(현 전남대 응급의학실 교수)과 함께 술만 마시면 “어떻게 응급실에서 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못 받느냐”, “응급의료체계가 한군데 모여 있다면 전부 불 지르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등 격한 말이 오갔다고 한다.
20대의 열정은 줄곧 윤한덕을 사로잡았다. 윤한덕은 평소 “응급실에서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를 다 쫓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응급실로 실려 오는 중환자들은 경험 많은 교수들이 진료해야 한다는 소신이었다. “왜 교수들이 외래에서 차분히 앉아 별로 중하지도 않은 환자를 보고 있냐”고 했다. 윤한덕이 평생을 바친 응급진료 시스템 구축은 이 말로 압축된다.
그는 늘 한자리에서 일했다. <한겨레>가 연락한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윤한덕 없이는 일이 돌아가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와 병원 경영진, 의사와 환자 등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곳에서 중심을 잡아야 했다. 보건복지부 관료들은 1~2년 단위로 바뀌었지만, 윤한덕은 상수였다. 응급의료 관련 지식에서 윤한덕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 없었다. 한 명의 열정에 의존하는 시스템은 과도한 책임을 윤한덕의 어깨에 지웠다. 윤한덕은 밤샘 노동으로 버텼다.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 이국종은 지난해 10월 펴낸 <골든아워>에서 이런 윤한덕을 두고 “자신의 일이 응급의료 전반에 대한 정책의 최후 보루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 외상 의료 체계에 대해서도 설립 초기부터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내가 본 윤한덕은 수많은 장애 요소에도 평정심을 잘 유지하여 나아갔고, 출세에는 무심한 채 응급의료 업무만을 보고 걸어왔다”고 적었다.
이국종은 윤 센터장을 ‘냉소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인물’로 기억했다. 2008년 겨울 그를 찾아갔을 때 “지금 이국종 선생이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동안에 아주대병원에 중증외상환자가 갑자기 오면 누가 수술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국종은 “그가 던진 질문은 ‘환자는 보지도 않으면서 무슨 정책 사업이라도 하나 뜯어먹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였다. 그는 내내 냉소적이었으며 나를 조목조목 비꼬았다. 그럼에도 나는 신기하게 그에게서 진정성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7일 오후 고 윤한덕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 집무실 앞에 누군가 놓고 간 커피와 국화꽃다발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그런 윤한덕도 지쳤던 것일까. 최근까지 여러 차례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 보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일을 그만두겠다는 게 아니었다. 센터장으로서 보는 시각이 정형화된 것 같아서 평직원으로 응급의료를 보고, 변화를 설계해보고 싶다는 뜻이었다.”(나백주 서울시 시민건강국장), “후임자를 찾을 수 없어 계속 일을 맡았고, 사무실 책상에는 위장약만 잔뜩 쌓여 있었다.”(유인술 충남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2009년 가을, 이국종·윤한덕 두 사람은 전남대 의대에서 열린 외상센터 관련 심포지엄에서 다시 만났다고 한다. 윤한덕은 발표를 끝내고 강당을 빠져나갔고, 이국종은 그를 쫓아갔다. 윤한덕이 찾아간 곳은 모교인 전남대 의대 강의실. 오래된 책상을 손으로 쓸던 윤한덕이 웃으며 홀로 말했다. “내가 말이야, 여기서 공부했었어. 이 답답한 강의실을 벗어나 졸업만 하면 의사로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지. 요즘 애들은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며 수업을 들으려나?”
‘꼼꼼한 완벽주의자’ 윤한덕(51)은 그렇게 세상을 돌보다 자신을 미처 돌보지 못했다. 설에 고향집에도 못 갔고, 지난 4일 자신의 사무실 의자에 앉아 홀로 떠났다.
이정규 황예랑 박현정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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