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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02 20:16 수정 : 2019.12.03 02:30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고 김용균 1주기 추모분향소에 세워진 작은 미술전시관에 사진작가 노순택의 작품 <김용균은 구의역에서 죽었다>가 설치돼 있다.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구의역 김군’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김용균’의 죽음이 ‘같은 죽음’이며,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새로운 김용균’임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그 앞으로 황망하게 떨어진 낙엽이 차디찬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오늘도 어디선가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을지 모를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 같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김용균 1주기 연속 기고
① 노순택 사진가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고 김용균 1주기 추모분향소에 세워진 작은 미술전시관에 사진작가 노순택의 작품 <김용균은 구의역에서 죽었다>가 설치돼 있다.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구의역 김군’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김용균’의 죽음이 ‘같은 죽음’이며,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새로운 김용균’임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그 앞으로 황망하게 떨어진 낙엽이 차디찬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오늘도 어디선가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을지 모를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 같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몇달째 달력 하나에 매달려 끙끙대고 있다. 오래전부터 만들고픈 달력이었다. 날짜만 적힌 달력이 아니다. 무엇인가 적어 넣을 ‘빈자리’가 있는 달력도 아니다. 우리 사회에 근대적 의미의 노동이 시작된 이래 오늘까지 벌어진 참극과 상처, 절박했던 호소의 나날을 하나둘 그러모아 날짜 아래 새겨 넣는 얼룩진 달력이다. 나는 이것을 ‘그을린 노동의 달력’이라 부른다.

오늘도 나는 달력에 새겨 넣기 위해 사건을 뒤진다. 날짜를 확인한다. 이름을 찾는다. 5월29일에는 1931년 가혹한 노동시간과 저임금을 규탄하며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라 최초의 고공농성을 벌였던 평원고무농장 노동자 강주룡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러다가 1989년 회사 쪽의 구사대 가입 강요를 뿌리치고 “노동자 분열책동 규탄한다”는 외침을 남긴 채 분신 자결했던 대우조선 노동자 박진석의 그날이 같은 날짜임을 발견하고 강주룡의 이름 아래 이어 적는다. 그날은 동료 박진석의 비보를 접한 이상모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함께 목숨을 끊은 날이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스무 살, 푸른 나이였다.

12월11일은 어떨까. 1997년 그날, 김영삼 대통령은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에 대해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했다. 많은 이들이 알듯 아이엠에프 사태는 괴물자본과 부패관료가 합작한 국가부도 사태였다. 하나 그들이 무슨 책임을 졌는가. “고통 분담”이라는 말로만 아름다운 구호가 애국가처럼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삶의 벼랑 끝까지 고통을 전담해야 했던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 평범한 노동자들이었다.

이듬해의 정권교체는 이 고통을 멈추게 해달라는 바람, 세상을 바꿔달라는 긴박한 요구가 담긴 것이었다. 하지만 바뀐 정권이 내놓은 건 기업 정상화를 위한 노동자들의 밑도 끝도 없는 양보였다. “노동자를 과보호하는 것이 기업 하기 어려운 나라를 만든다”는 기상천외한 흑색선전은 기업부도 사태를 넘어 국가부도 사태의 책임이 마치 노동자에게 있다는 기이한 느낌을 물들였다. ‘경직된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감언이설이 경제를 살릴 금과옥조인 양 숭배받았다.

묻고 싶다. 이 나라의 노동자들이 경직됐다 한탄할 만큼 보호받은 적이 있는가. 유연이라는 명분 아래 기업들은 ‘값싸고 말 잘 들을 수밖에 없는’ 불안한 노동자들을 제도적으로 공급받게 됐다. 어느새 20년이 훌쩍 지나 파견 노동, 하도급 노동, 외주 노동, 하청 노동, 비정규직 노동은 우리 곁에 가장 흔한 ‘유연한 고용’의 형태가 됐다. (위)험한 일일수록 비정규직 노동은 빛을 발한다.

김영삼의 대국민 사과 담화로부터 꼭 21년이 흐른 지난해 12월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석탄이송장치를 점검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끊긴 채 발견됐다. 삶이 끊겼다. 2인1조 야간작업이라는 안전규정은 비정규직의 현실엔 없는 규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부르대지 않는가. 그는 유연하게 죽은 거라고. 이 유연함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나는 달력에 죽은 노동자의 이름을 적어 넣는다. 1997년 12월11일 김영삼의 사과 아래 2018년 12월11일 김용균의 죽음을 이어 적는다.

통계에 따르면 하루 세 명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죽는다.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건 한 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언론에 보도라도 되는 죽음은 불행일까 다행일까. 살아 이름을 가지고 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죽어 호명될 때는 (고려해야 할 다양한 이유로) ‘김아무개, 이아무개’로 불린다. 김용균의 이름도 처음엔 김아무개였다.

“용균이의 이름으로 용균이와 같은 죽음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름을 불러달라. 얼굴에 모자이크도 하지 말아달라”는 어머니 김미숙씨의 결심이 있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이제부터 김용균이라는 이름을 부릅시다. 어머님이 아들의 이름을 불러주길 원하십니다.” 지난겨울 몸서리 내리는 추모의 광장에서 울려 퍼지던 ‘허락’의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국회에서 ‘김용균법’이라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대통령이 유족을 만나 위로했지만, 이 죽음의 행렬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고용노동부는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정부 시행령을 통해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을 시도한다. 톨게이트 수납 노동자들은 대법원에서 승소하고도 법을 우습게 아는 잘난 사장님 탓에 아직도 거리에서 신음하고 있다.

김용균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겨울광장에 눈물로 천막분향소를 다시 세운 까닭이다. 지난주 친구들과 나는 황량했던 천막분향소에 가벽을 세우고 작은 미술전시관을 만들었다. 분향소 곁 천막미술관이라고 불러야 할까. ‘구의역 김군’이 가방에 컵라면을 남겨둔 채 홀로 수리하다 죽어야 했던 스크린도어 사진 위에 김용균의 얼굴이 걸렸다. 김용균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만 죽은 게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은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김용균은 죽지 않았다. 왜냐면 오늘도 새로운 김용균이 아직은 죽지 않은 채 또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죽지 않았다면, 이 김용균을 살려야 하지 않을까. 죽은 지 일년이 지났건만 우리가 김용균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이유다. 죽은 김용균을 살려내라는 게 아니다. 아직 살아 있는 김용균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번주 내내 광화문광장에는 김용균들의 죽음을 생각하는 몸짓이 이어진다. 12월7일엔 위험의 외주화, 이 죽음의 행렬을 막고 싶은 모든 사람이 모여 촛불을 든다. 국정농단에 맞서 들었던 우리의 촛불이 단지 정권을 바꾸고 싶은 촛불이었나. 아니 세상을 바꾸고 싶어 든 촛불이었다. 죽음의 세상, 이 죽임의 사회를.

노순택 ㅣ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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