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인터뷰를 내보낸 조선일보 기사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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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군들의 ‘기대’ 저버린 조선일보…어떤 일이?
<조선일보>가 자신들의 우군들로 간주되어온 극우단체들의 맹비난을 받고 있다. 조선일보도 이따금 극우단체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를 쓸 수 있다. 하지만 ‘기사 한두 개쯤’이 아니다. 극우단체들은 “요즘 ‘조선’이 이상하다”며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다. 이런 낯선 현상이 일어나는 배경은 조선일보 지면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지난 2일 조선일보는 서울광장에서 열린 극우단체들의 ‘북한해방 3·1국민대회’를 ‘독도 갈등으로 뜨거워진 3·1절’이라는 기사 속에 100자 안팎으로 짧게 끼워 보도했다. 성조기로 물결치는 사진을 1면 머리사진으로 올린 뒤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 보도하던 예년의 태도와 견줘보면 큰 변화다. 특히 <중앙일보>가 같은 날 서울광장 행사 사진을 1면 머리에 배치했고, 일본 <마이니치신문>도 사진과 함께 상세히 다룬 점에 비춰보면, 조선일보를 지켜본 독자들은 변화를 눈치챌 수 있다. 조선, 극우단체 3·1절행사 짧게 끼워넣기 보도
하지만 한번의 보도로 극우단체들이 이렇듯 발끈할 리는 없다. 정작 극우단체들로 하여금 “이건 배신이야”를 외치게 한 것은 이튿날치 신문이었다. 조선일보는 3일 창간 85주년을 기념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1면 머릿기사와 4, 5면 전체를 털어 실었다. 조선일보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30년 묵은 ‘악연’을 감안하면 상당한 파격이다. 조선일보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악연은 하나하나 열거가 힘들 정도다. 김 전 대통령 재임시절 터졌던 언론사 세무조사와 노벨평화상 로비설 유포는 일진일퇴 국면의 상징적 사건이다. 악연의 대부분은 일방적 공격과 일방적 피해로 점철됐다. 김 전 대통령이 야당 인사로 민주화운동을 벌여온 박정희, 전두환정권 때 조선일보가 그에게 붙인 딱지는 ‘빨갱이’였다. 조선일보는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무조건적인 북한퍼주기’, ‘북한에 대한 굴복’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3일치 김 전 대통령 관련 보도에서 그의 목소리를 가감없이 전했다. 아무리 인터뷰 기사라지만 “북한을 개방시키기 위해 대북지원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을 제목까지 뽑아 보도했다. 형식의 파격에 이은 내용의 파격 앞에서 극우단체들은 조선일보의 ‘적과의 동침’으로 이해했을 법하다. 극우단체들과 극우인사들의 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인터넷 <독립신문>은 3일 보수단체의 이런 분위기를 다룬 “조선일보 변했나”라는 기사를 머리에 배치했다. <독립신문>은 기사에서 조선일보의 보도태도를 비판한 뒤 ‘북한해방 3·1 국민대회’를 주도한 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예비역대령)과의 인터뷰 내용을 상세히 다뤘다. 보수네티즌 DJ인터뷰에 “채울 기사 그렇게 없나…구독 끊겠다”
“조선이 현 정권에 함락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과거의 조선일보가 아니다.” 서정갑 본부장은 “이해할 수 없다. 상당히 믿었던 조선일보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한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국민행동본부 회원들은) 조선일보가 편집진이 바뀐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조선은 애국시민들이 크게 질렀던 북한 해방의 함성을 외면했다”고 실망감을 드러냈다. 보수 성향의 누리꾼들도 비판에 가세했다. 정봉수씨는 독립신문 게시판에 “조선일보 독자로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노벨상 로비 의혹이 보도돼 한국을 부끄럽게 만든 사람을 조선일보가 무엇이 궁해서 인터뷰했는지 모르겠다”며 “지면 채울 기사가 그렇게도 없었는지…이런 식으로 기사편집을 한다면 신문구독을 하지 않겠다”고 글을 남겼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변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행정수도 이전’을 앞장서 반대하는 보도를 해와 충청지역으로부터 불매운동까지 일고 있는 조선일보는 행정수도에 대한 보도방향을 바꿨다. 최근엔 슬며시 반발의 목소리를 죽이고 사실관계의 단순 전달자 노릇에 치중하고 있다. 수도이전 위헌판결 이후 심대평 충남지사 등 충청권 단체장 인터뷰를 잇달아 다룬 데 이어,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에서 ‘행정도시건설특별법’이 통과됐을 때도 3일치 신문 1면과 3면에서 ‘행정도시특별법 국회 통과’라는 제목으로 ‘난장판 국회’ 현장 중심의 스케치성 기사만 다뤘다. 예전처럼 사설이나 논평을 동원해 비난하는 일은 삼갔다. 조선일보의 지면 변화일까? 극우대신 뉴라이트로의 선회인가?
앞서 2일치 신문은 노무현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와 관련한 사설(‘우정의 해’에 금 간 한일 관계)에서도 한·일관계 과거사를 둘러싼 논란의 책임이 일본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지난해 ‘과거사를 외교 쟁점으로 삼지 않겠다’고 했던 노 대통령의 발언을 들어 우리 정부가 ‘짝사랑 외교’를 해왔다고 비판하며, ‘과거사 문제 해결’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극우단체들의 ‘실망감’을 근거로 최근의 조선일보 지면 변화를 단정하기는 이르다. 극우단체들은 “과거의 조선일보가 아니다”라고 반발하고 있지만, 얼마전부터 조선일보는 극우단체들의 집회를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내어왔다. 시청앞 극우집회를 ’구국의 외침’으로 전하던 지면이, 비판으로 선회한 것이다. 극우가 사라진 지면에는 대신 이른바 ’뉴라이트’라는 ’신보수세력’이 자리잡는 것으로 보인다. 3일자 조선일보의 김대중칼럼은 한나라당을 향해 집권능력이 안보인다고 질타한 뒤 신보수세력이 정치에 나서라고 주문하고 있다. [조선일보 김대중칼럼] 신보수, 정치 나서야(2005.3.3) 극우단체들의 반발을 부른 조선일보 최근 보도를 두고 그 진정성과 배경을 따지기는 아직 이르다. 조선일보의 오랜 ‘외길’ 보도에 견줘, 최근 변화가 관찰된 기간은 상대적으로 너무 짧기 때문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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