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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31 18:48 수정 : 2019.01.31 20:45

[짬] ‘씨알의 소리’ 박선균 편집주간

<씨알의 소리> 편집주간인 박선균 목사. 조현 종교전문기자

‘만 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1901~89) 선생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에서 ‘그 사람’에 가까운 이로 꼽히는 이가 있다. <씨알의 소리> 편집주간 박선균(81) 목사다. 한번도 신문 인터뷰를 하지 않았을 만큼 조용히 몇 걸음 물러서서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일에만 집중한 그였다. 박 목사는 갑작스런 인터뷰 요청에 “다른 분을 하는 게 어떠냐”고 거절하다 수줍은 표정으로 마침내 입을 열었다. 스승 함석헌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 만이다.

1971년부터 서울 원효로 함석헌 집의 창고를 개조한 곳에서 낸 <씨알의 소리>에서 박 목사는 편집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인 문대골 목사는 업무를 맡았다. 문 목사는 “선생님이 어디에 끌려가거나 죽을 위기 때도 ‘선균이가 있으니까, 선균은 내 맘과 같으니까’라고 말해 샘이 났다”며 농담을 한다.

박 목사는 고교 시절 함석헌을 처음 만났다. 강원 평창군 진부 산골에서 태어나 세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거친 세파에 던져진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일푼에 혈혈단신으로 상경했다. 그래도 기어코 부자가 되거나 고관대작이 되어 금의환향하고야 말겠다는 야망만은 컸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네 책장에 꽂힌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글을 본 순간 그 야망이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누군지를 말하리라. 신부 목사 교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풀이다. 나한테 주지도 않겠지만 나는 대통령을 준 데도 안 한다’는 글이었다.

고교때 함 선생 글 읽고 ‘사제 인연’
1971년 잡지 창간 초부터 편집 맡아
스승 서거 30주기 맞아 첫 ‘인터뷰’

“오래 모셨지만 지시하는 일 없어
씨알 정신은 함 선생 삶 자체였죠”
오는 4일 함석헌기념사업회 추모회

그 뒤 함석헌의 글을 찾아 읽으며 불의에 대한 저항의 불길이 솟아오른 그는 함석헌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기대치 않았던 답장이 왔다. ‘새싹이 열정만 갖고는 오래가지 못한다.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봐야하다’는 내용이었다. 고학생인 그는 장학혜택을 활용해 강남대 전신인 중앙신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곳에 함석헌이 강의를 왔고, 곧이어 함석헌의 지음자인 안병무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교장으로 왔다. 그는 신이 났고, 졸업 뒤에도 교직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학내 파동으로 함석헌 안병무가 그만두자 그도 사직하고 <씨알의 소리>에 가담했다. 그대로 있었으면 대학 교수로 편하게 살았을텐데 스스로 고난을 자처한 것이다. 그런 제자의 성품을 애틋하게 여긴 때문일까. 함석헌은 생전에 ‘누구든지 형사와 신부 목사되지 말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겠다’고 했지만, 박 목사가 ‘선배가 미아리 산동네 교회를 맡으라는데 목사 안수를 받을까요’라고 물었을 때 ‘하게 되면 해야지’라며 의외의 허락을 했다. 그런 사제지간이었기에 박 목사는 산동네 목회 시절과 전두환 정권 때 7년간의 폐간 때와 몇번의 공백기를 제외하고, 내년이면 창간 50돌을 맞는 <씨알의 소리>를 가장 오래도록 지켜왔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이후 지금까지도.

그는 37살 늦깎이로 결혼했으나 자녀는 두지 않았고, 부인은 2000년 세상을 떠나 홀로됐다. 동반자도 피붙이도 재산도 없이 자처한 고난이 그를 강고하게 했다. 함석헌이 그랬던 것처럼.

“선생님은 일제시대 오산학교에서 10년간 교사를 해서 월급 몇푼 받은 외엔, 월남한 뒤 2남5녀를 키웠지만 한번도 돈벌이를 한 적 없이 어렵게 살았다. 일제-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 모두 2년4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곳에서 노자, 장자와 불경과 사서삼경을 탐독해 높은 정신세계를 일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호를 바보새인 신천이라고 했다. 태풍을 타고 창공을 비상해 널리 날면서도 정작 땅에 내려오면 물고기 하나 잡지못하고 죽은 고기나 주어 먹는 새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박 목사는 함석헌의 진짜 호는 ‘씨알’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민(백성)보다 위대한 것이 없다’는 씨알정신은 함석헌의 사상만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고 그는 증언한다.

“학교에서나 어디에서도 모셨던 유명한 분들도 모두 명령과 지시과 훈육을 좋아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달랐다. 그렇게 오래도록 곁에 있었지만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씨알의소리>를 처음 맡았을 때 도무지 지시를 안해주니 답답했다. 그러나 누구든지 씨알을 가지고 있으니 스스로 일어나 하기를 바랐다. 그는 제자를 기른다든지 자기를 내세운다든지 그런게 없었는데 그 점이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라운 점이다.”

세간에선 고난 받는 이들을 동정하지만 그는 고난의 역설로 말을 맺었다.

“선생님은 고난이 많은 우리나라를 십자가에 못박힌 것으로 비유했다. 그랬기에 잘만하면 한국이 세계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남북한이 선생님의 씨알, 비폭력, 평화정신으로 함께 한다면 한국이 그런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오는 4일 오후 4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함석헌기념사업회 강당에서 ‘함석헌 선생 서거 30주기 추모회’가 열린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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