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4.14 21:16
수정 : 2006.04.21 20:41
[가신이의 발자취] 성악가 조수미씨 아버지 조언호씨
1980년대 중반 어느 여름 서울 근교 계곡에서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난달 31일 별세한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44)씨의 부친 조언호(70)씨가 친구들과 물놀이 갔다 부른 〈선구자〉였다.
큰아들 영준(41)씨는 “단 한번 들은 아버지 노래였다”고 회상했다. 193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조씨는 서구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그는 생전 자녀들에게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책임있게 생활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외대에서 영어를 전공한 그는 60년대부터 일찌감치 외국에 눈을 떠 오퍼상을 시작했다. 한 해의 4분의 1은 외국을 왕래하며 국제 감각을 익혔다. 그가 마지막으로 경영하던 회사 이름 ‘브이오’(바인 오버시즈)에는 바로 ‘포도 넝쿨처럼 해외로 뻗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조씨는 6남5녀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나 고교(부산공고) 때부터 객지 생활을 하며 독립심을 키웠다. 독립심은 그를 긍정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사고하게 만들었다. 그의 이런 인생관은 수미와 영준, 영구(38) 2남1녀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젊어 고생이 훗날 자녀들로 하여금 결단력과 독립심을 남겨주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이다.
60년대부터 외국 왕래 국제감각 키워
“스스로 선택, 세계로 뻗어가라” 가르쳐
수미씨 파리공연 아버지 임종 못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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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별세한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씨의 부친 조언호씨와 부인 김말순씨의 1962년 결혼식 모습.(사진 위) 지난해 있은 가족 모임에서 조언호씨(맨 왼쪽)를 비롯한 가족들이 함께 모여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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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는 사업이 어려워져 가세가 기울었을 때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어야 직성이 풀렸다. 84년 조수미씨가 서울 음대 2년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유학 갔을 때 일이다. 조씨는 딸을 곁에 앉히고 자신이 전에 수십 차례 방문했던 유럽의 공연장이며 오페라 하우스 등에 대해 조목조목 일러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이탈리아로 딸을 찾아갔다. 딸이 피아노를 사달라고 조르자 이튿날, 피아노 가게로 달려가 세계 최상품인 ‘스타인웨이 앤드 송’을 사주었다. 당시 가격이 4만달러를 훨씬 웃도는 고가품이었지만, 이 피아노는 훗날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의 탄생을 예비한 것이었다. 큰아들 영준씨 역시 국내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에서 10년 이상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오래전부터 국제화된 아버지 덕분이었다. 막내 영구씨가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할 때도 조씨는 “네 갈 길은 네 스스로 택하면 된다”며 아들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동갑내기로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부인 김말순씨와는 종종 의견 차이도 있었지만 사과의 손을 먼저 내민 것은 늘 조씨 쪽이었다.
지난 6일 삼우제도 지나 뒤늦게 파리에서 귀국한 조수미씨가 흑석동 성당 ‘평화의 집’ 납골당으로 아버지를 찾았다. 파리 공연으로 임종은 물론 장례식 참석도 못한 수미씨는 아버지 유골함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훔쳤다. 조씨는 “수없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면서 단 한번이라도 아버지만을 위한 공연을 하고 싶었는데 결국 이루지 못했다”며 목 놓아 울었다. 하지만 조씨의 가족은 “아버지가 ‘천상의 소리’를 지닌 딸의 노래를 천상에서 꼭 듣고 있을 것”이라며 위안 삼고 있다.
이상기 기자
amig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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