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에이다이 작가가 2010년 1월 아리랑문고에서 김효순 <한겨레> 대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탄광에서 도주한 조선인들을 돕다가 특고 경찰에 끌려가 고문으로 숨진 부친이 신관으로 일했던 신사의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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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일본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를 기리며
하야시 에이다이 작가가 2010년 1월 아리랑문고에서 김효순 <한겨레> 대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탄광에서 도주한 조선인들을 돕다가 특고 경찰에 끌려가 고문으로 숨진 부친이 신관으로 일했던 신사의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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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어린 취재·방대한 집필 ‘명성’
“한국 독자에 하고픈 말 많았던 듯”
뒤이을 일본인 보이지 않아 안타까워 1일 오후 별세한 하야시 에이다이는 평생 조선인 강제연행 등 일본 군국주의의 만행을 파고들어 박진감 넘치는 르포, 기록물, 자료집들을 낸 분이다. 호스피스에 들어가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근황은 ‘이비에스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항>이란 작품을 들고 얼마 전 방한했던 방송 디렉터이자 영화감독인 니시지마 신지로부터 들었다. 그는 “이런 일본인이 있었다는 것을 한국인들이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감독의 기대는 얼마나 충족됐을까? 그는 후쿠오카현 다가와에 있는 하야시의 서재 겸 자료실 ‘아리랑문고’에서 하야시 인터뷰가 수록된 내 졸저 <역사가에게 묻다>(서해문집·2011년)를 보았다고 했다. 하야시는 선뜻 믿기지 않을 만큼 다작의 작가다. 전부 합치면 58권이 된다고 하며 문고판으로 복간돼 중복된 것을 걸러내도 40여권에 이른다. 소재도 다양하다. 공해 문제를 다룬 초기 작품에서부터 일본의 대표적 탄전지대의 하나였던 지쿠호에서 혹사당한 조선인 광원, 조선인 특별지원병, 일본 패전 후 사할린에서 벌어진 조선인 학살 사건, 일본 식민통치 때 타이완(대만) 원주민으로 구성된 의용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자살특공용으로 중폭격기를 개조한 사쿠라탄기 등 일일이 소개하기에도 벅찰 정도다. 생전의 하야시에게는 적이 적지 않았다. 우선 우익들에게 그는 눈엣가시였다. 새로운 책이 나올 때마다 우익들은 심야에 무언전화를 걸거나 면도칼, 총알 등을 우편으로 보내 협박을 했다. 일본 현대사 연구자들 가운데도 그의 저작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비슷한 분야의 연구작업을 하고 있는데, 도저히 그렇게 많은 책을 쓸 수 없다는 거다. 이런 시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방대한 저작물들이 자료의 보고가 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쉽게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됐지만, 본격적으로 주목한 것은 2007~08년께다. 일제 말기 징병으로 관동군에 끌려갔다가 일본 항복 후 시베리아에 연행돼 강제사역을 해야 했고, 뒤늦게나마 한국에 돌아왔으나 ‘적성분자’로 감시당하는 고초를 겪은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을 취재하던 때다. 당시 한 피해자의 집에서 하야시가 쓴 <잊힌 조선인 황군병사-시베리아 탈주기>를 보았다.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해서 정독을 했는데 출간연도가 1995년이었다. 내가 관심을 갖기 10여년 전에 한 일본인이 먼저 들어와 누비고 다녔다는 것을 알고 절로 부끄러웠다. 그의 다른 저서들을 읽으면서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강제병합 100년이 된 2010년 1월 ‘국치 백년’ 특집기획의 하나로 그의 육성을 듣기 위해 다가와의 서재로 찾아갔다. 이미 폐암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괄괄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얘기했다.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기록을 남기는 일에 대한 그의 집념과 자세에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취재 주제를 정하면 10년이건 20년이건 추적을 한다고 했다. 조선인 강제연행 문제를 다룰 때는 조선인 피해자뿐만 아니라 그들을 학대하고 학살한 일본인 경찰, 노무관리자들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입을 열게 했다. 때로는 밤중에 탄광회사의 자료실에 몰래 들어가 숨겨놓은 문서들을 찾으러 뒤지기도 했다. 공식절차를 밟아 문의하면 무조건 없다고 입을 닫아버리니 달리 방법이 있었을까? 그는 많은 책을 쓰기는 했지만 원고료 수입은 신통치 않았다. 그럼에도 자기 돈을 써가며 취재를 해야 눈빛이 달라지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단언했다. 도쿄의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에 자료를 찾으러 갔을 때는 복사비로만 9만8천엔을 쓰고 돈이 떨어져 물만 마시며 버티다가 미리 사놓았던 기차표로 겨우 돌아왔다고 했다. 연구지원기관에 프로젝트를 신청해 채택되지 않으면 움직임이 무뎌지는 우리 지성계 일부의 풍토를 생각하면 아프게 와닿는 말이었다. 인터뷰 끝 무렵에는 유언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한국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이 아닐까. 하야시가 세상을 떠난 날은 묘하게도 1923년 조선인 학살의 비극을 가져온 간토대지진 발생일이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는 날로 심해져 1일 도쿄에서 열린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고이케 유리코 지사는 처음으로 추도문을 보내는 것조차 거부했다. 하야시의 후계자는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다. 일본 사회는 그저 부음 기사 하나로 그를 완전히 묻어버릴 것인가? 또한 한국 사회는 그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대로라면 하야시 선생은 지하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을는지…. 글·사진=김효순/언론인·<한겨레> 초대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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