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1.06 20:27
수정 : 2017.11.06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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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변정수 초대 헌법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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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강부약’ 소신…훈장 거부로 명성
헌재 위상정립·기본권 신장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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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변정수 초대 헌법재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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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헌법재판관을 지낸 변정수 변호사가 지난 5일 오후 6시4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
고인은 헌법재판관 재직 때 강자보다 약자를 위하는 ‘억강부약’의 자세와 국민의 기본권이 국가권력에 우선한다는 일관된 헌법관으로 의미있는 소수의견을 여럿 남겼다. 그가 낸 60여건의 소수의견과 20여건의 위헌 결정은 헌재의 위상 정립과 국민의 기본권 신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고인은 검사의 불기소 처분에 대한 첫 위헌 결정(1989년)으로 검찰권에 대한 헌법적 통제를 가능하게 했으며, 대통령의 국가비상대권 발동 사건(1994년)에서 주심을 맡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위헌 결정을 했다. 구속 피의자와 미결수가 변호인을 만날 때 교도관이 입회해 대화 내용을 적고 사진을 찍는 관행을 없앤 ‘변호인 접견 방해 사건’(1992년) 주심도 고인이다. 대법원의 법무사 채용규칙 헌법소원 사건에서도 위헌을 선고해 법률의 하위 법령에 대한 헌법심사의 길을 텄다.
고인은 소수의견의 한계도 절감해야 했다. 1988년 평민당 추천으로 재판관에 임명된 고인은 90년 3당 합당 이후 민감한 사안에선 대부분 8 대 1의 외로운 목소리에 그쳐야 했다. 그해 국가보안법 7조 찬양·고무죄 위헌 사건에서 홀로 단순위헌을 주장했고, 91년 사회보호법 사건과 93년 교수재임용 제도 위헌소송에서도 위헌 소수의견을 냈다.
현실 권력의 기본권 침해를 방파제를 자임했던 고인은 94년 임기만료로 물러나는 재판관들에게 청와대가 훈장을 수여하려 하자 ‘훈장을 받을 일을 한 게 없다’는 이유를 들어 혼자 수훈을 거절하기도 했다.
고인은 1930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광주서중을 거쳐 고려대 법대에 입학했다가 한국전쟁 와중에 대학을 중퇴했다. 56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20여년 재직하다 유신정권 말기인 79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1980년대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김근태 고문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에 변호인단으로 참여했고, 변협 인권위원장으로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인권보고서’를 펴냈다. 재판관 퇴임 뒤에는 2003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유족으로 아들 주호(개인사업)씨와 딸 일현·정옥·경영·정현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 8일 오전 8시. (02)2258-5940.
여현호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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