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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20 20:12 수정 : 2018.03.20 20:48

지난 15일 오후 목포효사랑장례식장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의 ‘서한태 박사 추도식’에서 최태옥 목포환경운동연합 고문이 추도사를 올리고 있다. 사진 목포환경운동연합 제공

【가신이의 발자취】 환경운동가 고 서한태 선생님 영전에

지난 15일 오후 목포효사랑장례식장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의 ‘서한태 박사 추도식’에서 최태옥 목포환경운동연합 고문이 추도사를 올리고 있다. 사진 목포환경운동연합 제공

선생님, 서한태 선생님. 홀연히 저희 곁을 떠나시니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1973년 제가 목포에서 병원을 개업할 때부터 이끌어주셨으니 어언 반세기, 회자정리이고 생자필멸이라고 하지만 의지할 곳을 갑자기 잃은 듯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항상 어려운 이들의 편에서 생각하시고 옳지 않는 것에 대한 준엄한 판단으로 우리 모두의 사표이셨습니다.

선생님은 목포중·고교 총동창회에서 저를 포함해 모든 동문들이 동경하고 따르는 선배의 제1번이었습니다. 목포시의사회 회장 때는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상호간에 배려하고 어려움이 없도록 정확히 이끌어 주셨고, 전라남도의사회 대의원 총회 의장 시절 깔끔한 회의 진행은 모든 회의 진행의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군사정권 시절인 1983년 목포시의 식수원인 영산호에 주정공장 건설 허가가 나자, 시민의 생명과 환경 보호에 나서 끝내 철수를 이끌어내셨습니다. 우리 환경운동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쾌거였습니다. 그때부터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 늘 환경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시고 옳은 일이면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밀어붙이셨습니다. 그 강건한 모습을 믿고 지금껏 45년 같은 길을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환경 관련 도서는 물론 인문사회과학 서적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고 많은 양의 독서를 즐기셨고 책 속에서 교훈을 얻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논의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며 시민토론의 광장, 대화마당을 자주 열어주셨습니다. 특히 늘 젊은 후배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늘 따뜻한 차를 나누며,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하시며 후배들의 의견을 묻곤 하셨습니다. 걸음이 불편해진 뒤로는 집 앞 곰탕집에서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꼭 두 번씩 후배들과 점심을 함께 하며 어울리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셨습니다.

항상 온화한 표정으로 조용히 타이르듯 들려주던 선생님의 말씀을 이제는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요. “쾌적한 환경 속에서 건강하게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회식 때면 항상 외치시던 건배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다시 듣고 싶은 말씀입니다.

구십 평생 환자의 몸 건강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나라를 넘어 지구의 건강까지 돌보는 의사로 남다른 삶을 일구셨습니다. 사모님과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6남매를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로 길러 내셨으니 수신제가에도 성공한 인생이셨습니다. 이제 힘든 일 다 하셨으니 모든 것 잊으시고 편안히 영면하십시오.

최태옥/목포시의료원장·목포환경운동연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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