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2.25 18:23
수정 : 2018.12.26 09:31
1~6급 폐지되고 내년 7월부터 ‘중증·경증’ 분류
활동지원서비스도 ‘종합조사’ 거쳐 맞춤형으로
하지만 장애 유형별 지원 시간은 되레 줄기도
장애인단체들 “생존권 달린 문제…진짜 폐지를”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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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장애등급제 희생자 고 송국현 동지 장애인장'. 혼자 거동하기 힘들었던 장애 3급의 송국현씨는 집에 갑자기 불이 나는 바람에 홀로 있다가 숨졌다. 정부는 2019년 7월부터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한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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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급’이었다. 지체장애 2급의 김정곤(49)씨는 근육이 이완되는 병을 앓고 있었다. 밤에는 꼭 호흡기를 차고 자야 했다. 아내도 지적·지체장애인이다. 예전의 ‘장애등급’에 따라,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달라졌다. 이들 부부에게는 하루 8시간의 활동지원서비스가 주어졌다. 활동지원사는 보통 저녁 6~7시면 저녁을 차려주고 퇴근했다. 나머지 16시간은 부부 둘이 오롯이 견뎌야 했다.
지난 17일 밤, 아내는 남편의 호흡기가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흔들어 깨웠지만 남편은 꿈쩍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팔의 힘이 부족해 호흡기를 채워주지 못했던 아내는 그냥 다시 잠들었다. 아침이 되어도 남편이 깨어나지 않자, 아내는 활동지원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남편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김씨 여동생의 남편인 이형일씨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한달에 240시간인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을 늘려달라고 했지만, 호흡기 장애는 활동지원서비스 대상이 아니라는 답만 들었다”고 전했다. 돌봄에 공백이 생기지 않는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가 제공됐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안타까운 죽음은 처음이 아니다. 2014년 4월에는 혼자 거동하기 힘들었던 장애 3급의 송국현씨가 집에 갑자기 불이 나 숨졌다. 그는 활동지원서비스 신청 자격도 없는 등급이었다. 그해, 뇌병변 장애 1급인 오지석씨는 활동보조인이 없는 사이에 호흡기가 빠지는 사고가 일어나 숨졌다. 오씨 역시 김정곤씨처럼 월 240시간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았다.
내년 7월부터 장애인에게 붙은 ‘등급’ 딱지가 순차적으로 떼어진다. 1~6급으로 등급을 매기던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는 대신에 ‘장애의 정도’가 심하거나(기존 1~3급), 심하지 않거나(기존 4~6급) 둘로만 분류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등급(1~3급)이 활동지원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절대적 기준’이었으나, 앞으로는 각종 서비스를 받을 자격을 ‘별도의 심사’를 거쳐 결정한다. 경증 장애인에게도 서비스 신청 자격이 생긴다. 필요에 따른 지원으로 체계를 전환한다는 취지다. 24일 국무회의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이 통과됐다.
장애등급제 폐지는 문재인 대통령의 장애인 관련 첫번째 공약이었다. 정부는 2019년 7월부터 2022년까지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로 했다. 대표적인 인권 차별로 꼽혔던 장애등급제가 31년 만에 ‘폐지’될 길이 열린 셈이다. 하지만 장애·인권단체들은 ‘진짜로’ 장애등급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지난 21일 성명을 내어 “말로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한다고 하지만, 적절하고 충분한 서비스 지원이 이뤄져야만 ‘진짜’ 폐지라는 것을 정부가 고인(김정곤씨)의 죽음을 통해 똑똑히 알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무회의를 통과한 시행령 및 시행규칙에 따르면, 활동지원급여와 보조기기 교부, 거주시설 이용, 응급안전 등 4가지 서비스를 지원받을 때 장애인들은 기존 ‘등급’이 아닌 ‘종합조사’를 거치게 된다. 조사원이 장애인의 복지 욕구, 생활수준, 건강상태 등에 대한 세부항목으로 구성된 종합조사표를 들고 장애인과 상담한 뒤에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종합조사표가 새롭게 도입되더라도, 김정곤씨가 하루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박경석 전장연 공동대표는 “종합조사표는 정부 예산에 맞춰 시험 칠 자격을 주는 시험지와 같다”며 “내년 예산을 크게 증액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눠 먹기 하다 보니, 뇌병변 장애인은 활동지원서비스 이용시간이 늘어나는 반면 시각장애인 등은 이용시간이 오히려 줄어드는 등 ‘장애 유형별’ 갈등만 유발한 꼴이 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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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들이 지난 11월 국회의원회관 앞에서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내년도 장애인복지 예산 확대 촉구를 요구하며 사다리와 쇠사슬을 목에 걸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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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장애인 활동지원 관련 예산은 1조35억원으로 올해(6907억원)보다 3128억원이나 늘었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서비스 단가가 1만760원에서 1만2960원으로 늘어나고, 이용 대상자가 7만1천명에서 8만1천명으로 증가한 것이 반영된 예산 증액일 뿐, 실제 지원을 받아온 장애인들이 이용할 서비스 시간은 늘어나지 않았다는 게 장애·인권단체들의 설명이다.
보건복지부가 종합조사표에 근거해 기존 서비스 수급 장애인 1886명을 대상으로 모의적용을 했더니, 시각장애인은 활동지원서비스 이용시간이 기존 월 119시간에서 110시간으로 9시간 줄었다. 종합조사표에 돌발행동 등 인지행동 특성 항목이 신설된 탓에, 시각장애인의 점수가 하락하기 때문이다. 반면 뇌병변 장애인은 이용시간이 8.7%가량 늘었다. 장애인의 생존이 이제 ‘등급’이 아니라 ‘종합조사표’의 점수에 좌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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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복지부 장애인정책과 관계자는 “장애인단체와 민관 협의체를 구성해 논의 중이고 활동지원서비스 확대 등 장기적인 방향에는 공감한다”며 “다만 스웨덴 등 북유럽처럼 사회복지 공무원이 개별 면담을 통해 장애인의 선택권이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장애 유형이나 지역 간 형평성을 고려한 표준적인 계량지표 마련을 위한 종합조사표 도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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