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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02 16:54 수정 : 2005.01.02 16:5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과 의리인가, 아니면 경제와 쾌락인가. 이 문제는 윤리학의 분야에서 흔히 제기되는 물음이다. 서양 근대 윤리학의 큰 흐름은 영국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 두 진영으로 크게 니눠진다. 먼저 공리주의는 공공의 ‘이익’(utility)을 윤리학의 기본 원리로 삼는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이익(쾌락)을 향유하는 쪽으로 행동하면 도덕적으로 옳다”고 본다.

이에 반하여 칸트는 어떤 행위의 결과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조건 때문에 도덕적인 선이 된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도덕은 ‘조건 없이’ 의무감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이것을 칸트는 ‘정언명법’이라고 표현했다.

전통적인 동양의 도덕적 논의도 기본 구조는 매우 비슷하다. 공자는 정의(義)와 이익(利)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본다. 군자는 사사로운 이익(利)보다는 사회 정의(義)에 우선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 한다. 이에 반발하여 묵자는 “정의(義)와 이익(利)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義, 利也)”라고 주장하였다. 묵자는 일종의 공리주위자였다.

그러나 공동선을 우선하는 유가에서는 의(義)를 앞세우는 것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주자의 서원에는 “의를 바로잡되 이익을 도모하지 말며, 도를 실천하되 그 공을 헤아리지 말라”는 말이 현판에 들어 있었다. 우리의 선비문화 전통에서도 당연히 이러한 태도가 강조되어 왔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같은 이름의 소설에서 ‘이웃간의 사랑과 의리’로 대답했다. 조선의 선비들도 마땅히 인의(仁義)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돈과 쾌락 때문에 산다고 말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피상적인 측면이다. 사람은 누구나 도덕성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기 떼문이다.

김수중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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