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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3 16:24 수정 : 2005.01.23 16:24

삐뚤빼뚤 쓴 ‘시인’ 보니 웃음꽃

방학을 했지만 할 일이 많이 남아 학교에 갔다. 이왕 온 김에 주변 정리를 한다고 여기저기 쑤시다 보니, 운동회 때 썼던 ‘꿈국기’ 뭉치가 나온다. 꿈국기는 아이들이 종이에 자신의 장래 희망을 적고, 그림을 그려 꾸민 것이다. 운동회 날 보통은 행사 분위기를 위해 만국기를 다는데, 우리 학교는 아이들에게 좀 더 뜻 있는 운동회를 만들어 주자고 해서 꿈국기를 달았다. 그때 쓰고는 버리지 않고 교실 한 쪽에 두었는데 이제야 내 눈에 띈 것이다. 그걸 다시 보자니 꿈국기를 달던 때가 생각났다.

운동회 전날 교사들이 운동장을 빙 둘러 전교생의 꿈국기를 달았다. 처음에는 예쁘게 색칠하거나 잘 꾸민 것을 살펴보며 “얘는 잘했네” “쟤는 못했네” 품평회를 했는데, 보면 볼수록 장래 희망이라는 게 거의 비슷비슷하고 고정돼 있어 새삼 놀라고 말았다. 30여 년 전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판사, 의사, 박사, 과학자 등이 장래 희망이라는 것이다. 아이답지 않은 어른들에 의해 전이된 이 대리 희망들 앞에서 나는 좀 당황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어도 우리 교육이 아이들에게 다양한 꿈과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제 멋대로 꿈꿀 수 있는 권리, 고정되지 않고 수시로 바꿔 가며 상상할 수 있는 아이다운 권리를 어른들이 빼앗고 있었다. 세상은 변하는데, 우리들의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교사인 나는 아찔했다.

그러니 공연히 마음이 무거워져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땅만 발로 툭툭 차게 됐다. 그렇게 말을 안 하고 한참을 줄만 잡아 주다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 우연히 우리 반 것을 달고 있었다. 그제서야 우리 반 것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대는 안 했지만 다시 확인하니 더 마음이 안 좋았는데, 연필로 ‘비뚤빼뚤’ 쓴 우리 반 말썽꾼 원재의 것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장래 희망, 시인’ 시 쓰기 시간에 몇 번 칭찬을 받은 녀석이 제 꿈을 시인이라고 적은 것이다. 돈과 명예, 편하고 안정적인 직업들 속에서 그걸 발견하니 무슨 보석을 주운 것처럼 기뻤다. 얼굴에 점점 웃음이 번지는데 그걸 주체를 못하고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고개를 쳐 박고 있던 사람이 깔깔거리고 웃으니 다른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목소리에 힘을 주고 “원재, 이리 와 봐라” 하고 원재를 불렀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꽉 안아 줬다. 영문 모르고 또 뭐 혼날 일이 있나 싶어 긴장했던 녀석은 안아 주자 안심을 했는지 헤헤거리며 좋아했다. 그렇게 끌어안고 웃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얼굴에 다시 웃음꽃이 핀다. 참 기분이 좋다. 그때는 잘 안 보였는데 다시 살펴본 원재의 꿈국기에는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노원재 시인이 쓴 시집을 무료로 드립니다.’ 희망의 씨앗이다.

김권호/서울 일신초등학교 교사 kimbec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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