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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04 20:59 수정 : 2019.04.05 08:14

정부, 인문사회 학술생태계 활성화

‘인문학 연구’ R&D 예산의 1.5%뿐
대학 10년새 관련 학과 14% 줄어
2017년 폐과 절반은 인문사회 학과

정부, 학문후속세대 지원 초점
대학밖 비전임 연구자들에 혜택

학총, 17일 학술정책 토론회
“전담기구 설립 필요” 지적도

■ 관련기사 : 정부, 인문사회 학술생태계 키운다

올해 시행되는 ‘강사법’을 둘러싼 혼란은 우리나라 대학과 학문의 위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플라톤 전집’을 펴내는 등 그리스 고전들을 연구해 우리말로 옮기는 데에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연구단체 정암학당 역시 최근 대학들의 ‘강사법’ 회피에 따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연구원들 가운데 대학 강의 등에 기대어 생계를 꾸려온 연구자들이 많은데, 이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대학이 없으면 일자리가 없고, 강의가 없으면 연구도 어렵다. 젊은 연구자들도 나타나지 않는다. 가뜩이나 서양 사상의 뿌리인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제대로 된 원전 완역본조차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땅에 그리스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까? 이는 ‘대학의 위기’가 대학뿐 아닌 전체 ‘학문의 위기’로, 특히 ‘돈이 되지 않는’ 인문사회·기초학문의 위기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올해 기준으로 20조원이나 되는 국가 전체 연구개발(R&D) 예산 가운데 인문사회·기초학문 분야는 1.5%에 불과하다. 2019년 한국연구재단 연구개발비 3조5555억원 가운데에서도 인문사회 분야는 2315억원에 그친다.

기업화된 대학에서 인문사회·기초학문이 버림받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학령인구의 절벽, 전임교원의 노령화, 비전임 연구자들의 생계 불안 등까지 겹쳐 위기는 갈수록 심화되어왔다. 2007~2017년 사이 전체 4년제 대학의 인문사회 분야 학과는 14.2%나 줄었고, 입학정원도 13만6000여명에서 11만5000여명으로 15.6%나 줄었다. 2017년 대학에서 폐과된 학과 가운데 인문사회 학과의 비율은 전체의 49.6%에 이른다.

■ 대학의 위기가 학문의 위기로… “정부 나서라” 학계 한목소리

지난해부터 불거진 ‘강사법’ 파동은 ‘학문의 위기’로 이어지는 ‘대학의 위기’를 첨예하게 드러냈다. 비전임 연구자들은 그나마 강의를 발판으로 대학 안에 존립 근거를 마련해왔다. 그런데 대학들이 ‘강사법’을 회피하기 위해 강의와 강사를 줄이면서 이들이 대학 밖으로 내몰리고, 결과적으로 고등교육의 질적 하락과 학문후속세대의 공동화에 대한 우려가 심화됐다. 2018년 기준 인문사회 분야 시간강사의 규모는 3만여명인데, 이는 비전임 연구자의 전체 규모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강사법’이 실제로 시행될 2학기에는 강의·강사가 어느 정도나 줄어들지 아직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는 “한 나라의 학문 연구와 연구자 양성 및 지원 전반을 설계하는 학술정책 없이는 더 이상 대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이 존립하기 어려운 심각한 현실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번 정부의 ‘인문사회 학술생태계 활성화’ 방안은 대학 밖으로 내몰리는 학문후속세대의 지원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학계에서는 ‘학문후속세대’가 이처럼 구조적인 이유로 대학에서 자리잡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이들을 양성하는 것이 정부가 나서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한다. 국가가 비전임 연구자들을 직접 지원하는 ‘국가교수’ 또는 ‘국가박사’와 같은 개념의 제도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미 대학들은 정부의 대규모 재정지원 사업에 기대고 있는 실정이지만, 전임이 아닌 비전임 연구자들은 그 혜택을 보기 어렵다. 인문사회의 경우 비전임 연구자가 전체 연구인력의 50%를 차지하는데도, 비전임 연구자들이 지원받는 비중은 35%에 불과하다.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사업 가운데 비전임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은 ‘박사후 국내연수’, ‘학술연구교수’, ‘시간강사연구지원사업’ 등이 있는데, 올해 이 3개 사업의 지원자 총합은 1780명, 연간 지원 규모는 363억원 정도다. 게다가 관리주체를 ‘대학’으로만 정해놔, 대학 밖에 있는 연구자들은 애초 지원 자체가 불가능했다. 정부가 새로 내놓은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제도는 이런 기존 제도의 약점들을 보완한 것이다.

다만 학계 일각에서는 지원 규모가 획기적으로 늘어나지 않는다면 큰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다. 아직 확정되진 않았지만 내년 기준으로 지원 규모가 3000명 정도가 될 거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데, 이는 전체 비전임 연구자들의 10%에 불과하다. 게다가 앞으로 대학들의 ‘강사법’ 회피로 갈수록 더 많은 비전임 연구자들이 대학 밖으로 내몰릴 것도 감안해야 한다. 김명환 교수는 “적어도 6000~7000명 수준으로까지 지원 규모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비전임 연구자들의 연구 역량이 전임 연구자들보다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연구재단에서 전임과 비전임 모두를 대상으로 삼는 지원사업(신진연구자, 중견연구자, 저술출판, 명저번역)의 누적 선정율을 보면, 비전임 연구자들은 신청 자체를 많이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전임에 크게 떨어지지 않는 선정율을 보였다. ‘명저번역’의 경우엔 비전임(12건)이 전임(7건)보다 더 높은 선정률을 보였다. 박구용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은 “비전임 또는 독립 연구자들은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기회가 없었을 뿐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지표”라며, “여태껏 연구를 독점해온 대학의 틀을 벗어나, 지역·시민사회 등에서도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연구자들을 발굴해 시민과 공유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학문후속세대 양성뿐 아니라 중장기 학술정책 수립으로

학계에서는 당장 ‘발등의 불’인 학문후속세대 지원뿐 아니라 중장기 ‘학술정책’ 마련도 시급하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학술단체총연합회(학총)는 오는 4월17일 서울대에서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인문사회분야 학술생태계 활성화 방안’(가칭)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 예정이다.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은 18일에, 대학정책학회는 12일에 각각 ‘학술정책’과 연관된 내용으로 토론회를 열 계획이다. 정부 역시 이번 발표에서 “학계가 중심이 되어 학문 전 분야를 아우르는 학술 중장기 비전 마련”을 향후 추진과제로 제시했다.

과거 정부들은 산업화 등 눈앞의 과제에 필요한 실용학문에는 국가적 차원의 투자를 해왔지만, 그 기본이 되는 인문사회·기초학문 분야는 등한히 여겨왔다. ‘촛불정부’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란 기대를 받았지만, 국정과제 어디에도 ‘학술’ 또는 ‘학문’이란 말조차 포함되지 않아 실망감을 안겼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지난해부터 ‘촛불정부’가 반환점을 돌기 전에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한겨레 2018년 6월8일치 ‘학술정책 백년대계가 없다’ 참조)

‘학술정책’ 관련해 가장 관심이 쏠리는 대목은 독립적 위상을 갖춘 학술전담기구의 설립 여부와 그 방법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모든 국민이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22조 1항)고 규정하고 있고, 학술진흥법은 “정부는 학술수준을 향상시키고 건전한 학술풍토를 조성하며, 학술활동의 성과가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지원하여야 한다”(제3조)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실질적인 수행 주체가 모호해, 그동안 중장기적인 관점으로 학술정책을 펴나가는 정책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교육부에서 학술 분야는 10여명 남짓 규모의 학술진흥과 업무로만 맡겨져 있다. 한국연구재단은 기본적으로 연구비 집행·관리 기관인데다 그 안에서도 인문사회·기초학문 분야는 거대한 과학기술 분야에 짓눌려 있는 실정이다. 정부 지원에 대한 실적을 양적으로만 취급하는 관료의 독접적인 관리 아래 인문사회·기초학문 분야가 갈수록 영세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17일 학총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이강재 서울대 교수(중문학)는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에 대한 지원뿐 아니라 중장기 학술정책의 수립, 학술 분야에 대한 평가와 조사 등을 전담할 기구의 설립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학술 전담기구 관련해선 과학기술정책 분야의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등이 참고 사례로 거론되기도 한다. 다만 그 형태와 위상에 대해서는 국가고등사회과학원, 대통령 직속 국가학술위원회, 독립 관청으로서 학술진흥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산하 학술정책연구원 등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되어 논의가 분분하다. 교육부 내부에서는 사회부총리 산하에 ‘한국학술진흥원’을 설립하고 학자들이 참여하는 ‘한국학술진흥위원회’를 만드는 등의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랫동안 학술정책 수립에 대한 의견을 내온 한 인문학자는 “학술전담기구가 만들어진다면, 우리나라 학술 ‘장’(場)의 전체 현실을 파악(자료 수집과 분석)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무엇을 추구할지 고민(전략과 기획)하고 실천(집행)하는 기능까지 갖춰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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