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11 07:01
수정 : 2019.10.09 13:53
【우리 아이 마음 키우기】
간밤, 비가 내렸다. 햇살이 고개를 들고 미세먼지 없이 화창한 날이다. 이런 날이면 수업 대신 학생들과 소풍 가고 싶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 무거움이 고개를 든다. 그날의 긴장이 내게는 어느새 작은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다.
그날은 모든 것이 완벽한, 눈이 부시게 화창한 날이었다. 아이들은 재잘거리고 싸우는 아이도 없이 서로 옹기종기 모여 즐겁게 지내는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고민이 있다면, 하나만 써보세요.”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쓰게 한다며 원망하듯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못 본 척 대꾸해주었다. “고민을 적어야 운동장에서 놀 수 있어.”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대충 먹고 운동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뛰어나가는 아이들에게, 놀기 좋은 날 무언가 적고 나가라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 ‘고민 ×’라고 적는다. 아이들이 하교한 뒤 빈 교실 햇살 가득한 분위기에 커피 한잔 마시며 아이들의 ‘고민 없음’을 읽으며 혼자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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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비행소년 KW4839>.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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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고민을 적어놓은 아이들이 있다. 그럴 땐 메모해놓고 기회가 될 때 해당 아이에게 피드백을 해준다. 그 귀한 점심시간에 표현한 고민이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한 번 되짚어주는 성의가 필요하다. 그렇게 고민 쪽지를 넘기는데 한 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커피 향기는 먼지 냄새로 바뀌고, 햇살 가득한 교실이 회색빛으로 바뀌었다.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긴장한 채 제자리만 왔다 갔다 했다. 정신을 차리고 명수(가명)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학원에 가 있을 시간이라 했다. 만사 제쳐놓고 학원으로 무조건 달려가라 했다. 직장맘인 명수 어머니는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장난 아닐까요?” 단호하게 말했다. “장난이었어도 무조건 달려가 주셔야 합니다. 학원 수업 도중이라도 그냥 데리고 나오세요.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사주세요. 오늘 무조건 그렇게 해주셔야 합니다.”
명수 어머니 말대로 장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의 존재를 없애버리고 싶다는 표현에 아무런 응답이 없을 경우, 아이는 깊은 외로움 속으로 빠져버린다. 내가 죽고 싶다고 표현했는데 세상이 오늘, 그리고 내일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에 의심을 품게 된다. 세상이 바뀌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내 주변에 뭔가 반응이 있어 주어야 한다.
명수 어머니는 직장에서 나와 명수를 데리러 갔다. 피자도 사 먹이고 운동화도 사주었다. 명수는 학원 수업 중 어머니가 달려와 데리고 나간 사실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맛보았다. 다음날 명수를 불렀다. 고민을 적은 쪽지를 보여주며 대답을 기다렸다. 명수는 한마디 했다.
“그냥요. 그냥 뛰어내리고 싶었어요.”
그냥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말을 어른은 이해할 수 없다. 어른이 해줄 수 있는 건 아이가 그런 표현을 했을 때 그냥 달려가 주는 것이다. 그 행위만으로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읽는다. 자존감은 누군가 나를 향해 달려왔던 기억에서 시작된다. 이젠 날씨가 화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선호 서울 유석초 교사, <초등 자존감의 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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