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23 05:00
수정 : 2019.10.09 13:39
【왕용샘의 ’학교도서관에서 생긴 일’】
학교도서관에는 많은 학생이 찾아와 책을 빌리고, 수업을 듣습니다. 그중 이야기를 하고 싶어 찾아오는 학생도 종종 있습니다. 담임 선생님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저에게 쏟아내고 가는 학생들을 보면 학교도서관 공간이 주는 아늑함은 묘한 힘이 있나 봅니다.
희귀성 난치병에 걸려 같은 반 친구보다 생각도 나이도 많은 아이, 좋아하는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아이, 성적이 떨어져 고민인 친구 등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상담을 해준다는 것이 엄청 어렵더군요. 어설픈 상담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는지 고민도 되었습니다. 이제는 적극적 경청만 합니다. 학생들은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는 힘이 있더라고요. 제가 어설프게 개입하는 것보다 잘 들어주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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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22일 오전 서울 김포공항을 출발해 일본 하네다로 가는 전일본공수(ANA) 출국 수속 창구 앞에서 출국자들이 일본 참의원 선거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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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어느 날, 도민(가명)이라는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일본을 정말 좋아하고, 꼭 여행 가보고 싶다는 친구였습니다. 집에서 허락을 구하고 혼자서 여행을 가고 싶다는 친구는 일본 여행에 관한 책도 찾더군요. 일본 여행 정보가 담겨 있는 책이 있는 서가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슬구의 <우물 밖 여고생>이라는 책을 추천했습니다. 책이 대출 중이어서 당장 빌려주지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라도 구해주고 싶더군요.
책은 십대인 슬구가 처음으로 혼자 일본 여행을 떠난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낯선 곳에서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작가가 마음의 문을 열며 점점 세상의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천천히 가벼운 문체로 풀어쓴 책입니다. 도민이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 있었지만, 낯선 곳이라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딱 적당한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로도 도민이는 도서관에 와서 일본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았다는 말, 용돈을 모아 여행 예약을 했다는 말, 여름방학이면 도쿄에 가게 될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적극적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도민이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 등으로 인해 한-일 국가 간 갈등이 있다는 사실은 전국민이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으로 이어지고, 일본 여행도 보이콧하는 일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도민이가 며칠 전에 찾아와 이야기하더군요. “선생님, 저 일본 여행 취소했어요. 수수료만 25만원이에요.” 도민이가 열심히 모은 돈으로 일본 여행을 예약했다고 들었습니다. 일본 여행을 취소한다는 도민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의 결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엄지를 들어 올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십대를 철없는 미완성 인간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만난 친구들은 그 말씀을 하시는 분들에 비해 훨씬 더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고민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주변 일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 참여를 하는 성숙한 사람이지요. 물론 경험이 부족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어설픈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이를 떠나 사람이라면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도민이 상황이라면 우물쭈물하다가 여행을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매몰비용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갈팡질팡했을 저에게 도민이는 가르침을 주더군요.
“선생님, 매몰비용에 대한 아쉬움보다 지금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일본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요.”
학교도서관에 찾아오는 학생들을 만나보면 제가 오히려 배웁니다. 난치병에서도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학생을 보며, 매번 열심히 해도 실패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또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에게서,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아 전진하는 친구에게서 인생을 배웁니다.
황왕용 광양백운고등학교 사서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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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왕용 광양백운고등학교 사서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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