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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08 15:49 수정 : 2005.01.08 15:49

"시신 수천 구 속에서 그나마 4구라도 찾았으니 다행이네요"

지난해 12월31일 지진해일 참사 현장인 태국 푸껫에 지문감식반으로 파견됐다.

8일 오전 귀국한 박희찬 경사는 공항에서 기자를 만나자마자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소속의 박 경사는 김왕선 주사,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연구원 2명과 함께 크라비 지역 병원은 물론 시신을 `쌓아두는' 곳을 지문 감식장비를 들고 8일 동안 누비고 다녔다.

박 경사는 신발이 시신에서 나온 구더기로 범벅이 되는 바람에 신발을 버리고 슬리퍼를 끌고 인천공항 입국장에 들어섰다.

"11살난 아이를 치열로 찾아 유족에게 넘겨주고 어머니를 찾으려고 `한국인인것처럼 보인다'는 소문만 들으면 정신없이 뛰어가 시신확인을 한 끝에 3시간만에 어머니 시신도 함께 찾았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와 습기 때문에 대운동장에 나열된 시신은 얼굴을 알아볼 수없을 정도로 부패해 악취가 진동했지만 유족의 안타까움을 생각하면 `지문을 따는' 작업을 그만둘 수 없었다는 것.


카오락에서는 태국 정부가 시신 보관소에 접근을 금지해 나머지 한국인 실종자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박 경사는 털어놨다.

시신을 항상 상대해야 하는 과학수사센터 경력 23년의 베테랑 경찰관이지만 이번 참사현장은 `소름끼칠' 정도였다고 한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도 시신 발굴 작업에 참여한 박 경사는 "삼풍백화점 사고 땐 그나마 얼굴이라도 남아 있어서 확인이 쉬웠던 편"이라며 "삼풍백화점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사현장이었다"고 말했다.

운동장에 놓인 시신이 썩어가니까 드라이 아이스를 군데군데 놨지만 금세 무용지물이 되곤 했다.

끼니를 때우는 것도 여의치 않아 구호품으로 온 컵라면을 얻어먹으면서 수천구의 시신을 들추고 다녔다.

박 경사는 "현지에서 일하는 선교사와 교민의 도움없이는 성과가 없었을 것"이라고 고마움을 전했다. (영종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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