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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8 17:48 수정 : 2005.01.18 17:48

■ 이홍훈 제주지법원장 - 노동자등 '약자' 위한 판결 주목

이홍훈(59·사시 14회) 제주지법원장은 행정사건 항소심 재판장으로 있으면서 언론·출판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거나, 내부고발로 일방 해고된 노동자를 구제하는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판결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 2002년에는 민주노총 간부 나아무개씨가 미군 부대 앞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현수막을 걸려다 춘천시와 마찰을 빚은 ‘춘천 국보법 현수막 사건’ 판결을 통해, 기본권 보장을 위한 자신의 소신을 뚜렷이 밝히기도 했다. 당시 서울고법 특별4부 재판장이었던 이 법원장은 ‘공익’을 이유로 춘천시의 현수막 게재 불허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단한 원심을 깨고 나씨의 손을 들어줬다. “국가안보를 내세워 국보법 폐지 주장 자체를 제한하는 것은 헌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언론·출판에 대한 검열이므로 부당하다”는 것이 판결이유였다.

철도차량의 부실보수를 언론에 제보해 보복성 해임 조처를 당한 내부고발자를 적극적인 사실판단을 통해 구제한 사례도 있다. 지난 2001년 언론사 제보 뒤 근무태만 등을 이유로 해임당한 철도청 직원 황아무개씨가 낸 징계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이 법원장은 “황씨의 해임은, 실질적으로 철도차량의 하자 보수 문제를 언론에 제보해, 보도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며 원심을 깨고 원고승소 판결했다. 당시의 판결은 철도청이 징계사유로 삼지 않은 언론제보를 실질적 해임사유로 판단한 것이어서 내부고발자 보호를 위한 적극적인 조처로 평가받았다.

지난 1990년 김천지원장 시절, 후배판사들과의 부부동반 모임을 위해 서울서 내려온 부인을 관용차에 태우지 않고 택시로 움직이게 했다는 일화는 공·사 구분이 철저한 그의 ‘고집’을 보여준다고 지인들은 말한다. 고 조영래 변호사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과는 경기고-서울대 동기동창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각별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990002%% ■ 이공현 법원행정처 차장 - 법조문 한글화 작업 등 주도

이공현(56·사시 13회)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론과 실무를 두루 갖췄다는 평을 듣는다. 1993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각국의 사법제도 등을 연구했으며, 국제재판 관할권과 관련한 논문도 많이 발표했다. 이를 바탕으로 사법연수원에서 강의도 했다. 실무 면에선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실장으로 있을 때 민사소송법 전면 개정과 법 조문의 한글화 작업이 이뤄졌고, 특허법원과 행정법원이 문을 열었다.

특히 생활법률 개선작업에 나서면서 신문의 3년치 독자투고란을 검토해 ‘전세등기 확정일자’ 발급장소를 애초 법원 등기소에서 전입신고를 하는 읍·면·동사무소로 바꾼 일화는 유명하다.

이 차장은 민사판례연구회(민판련) 소속으로 노무현 정권 들어 사법개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나, 성향은 ‘중도’로 분류된다. 때문에 세인들의 기억에 남는 ‘뚜렷한 판결’은 많지 않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법원행정처 등 재판의 ‘현장’을 떠나 있었던 기간이 상대적으로 긴 탓이다.

그러나 1995년 부산고법 부장판사 시절 ‘조총련간첩단 사건’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는 처음으로 재심결정을 내렸다. 또 90년 동의대 입시부정 사건 때는 검찰의 의견과 달리 “입시부정이 있었다”고 판결해 결국 학교 관계자가 구속기소되도록 했다. 이밖에 전교조 교사에 대한 재임용 취소가 부당하는 판결과 커피 심부름을 거절했다가 해고된 여사원에 대한 복직 판결 등이 눈에 띈다.

그러나 2001년 해고노동자들의 집회를 놓고 회사쪽과 주변 상인들이 이를 금지해 달라며 각각 낸 가처분신청에 대해 ‘수용’과 ‘기각’으로 엇갈린 결정을 내려 ‘오락가락 판결’이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2002년 2월 발표된 공직자 재산공개 때는 강남의 50평대 아파트를 팔면서 시세차익으로 한해 동안 5억8천만원이 늘어나 법조계 인사로는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990003%% ■ 양승태 특허법원장 - 사시제도 개혁등 행정능력 탁월

양승태(57·사시 12회) 특허법원장은 법원 안에서 ‘행정의 달인’으로 불린다. 고위직 법관이 된 뒤로 그의 이력은 ‘재판’보다 ‘행정’쪽에 치우쳐 있다.

법원행정처 송무국장, 사법정책연구실장, 차장 등 행정처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민사·등기 전산화, 집중심리제 등 새 송무제도 도입의 산파 구실을 했다. 사법정책연구실장으로 있던 1995년에는 ‘사법시험 합격자 증원’ 등 일부 개혁을 이뤄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법원 행정업무에 있어서 양 원장은 언제나 ‘방향타’를 쥐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서울지법 파산부 초대수석부장으로 외환위기 이후 법정관리기업의 처리를 도맡아, 회사정리법을 정비하고 파산실무연구회를 꾸리기도 했다. 법정관리회사의 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한 법정관리인을 처음으로 검찰에 고소한 일도 있다.

눈에 띄는 판결은 그리 많지 않다. 서울지법 북부지원장이던 2001년 호주제에 대해 위헌심판제청을 해 주목받은 정도다. 양 원장은 “현행 호주제가 호주를 정점으로, 가족들의 순위를 강제로 매겨 평등한 공동체 형성을 불가능하게 한다”며 위헌심판을 제청했고, 이듬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선정한 ‘여성권익 디딤돌’로 뽑혔다. 이를 근거로 진보적이라는 일부 평가도 있지만, 법원행정처 차장이던 2003년 8월 대법관 제청과 관련해 소장판사들이 연판장을 돌린 데 충격을 받아 사의를 밝혔다가 거둬들인 일을 두고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양 원장은 친화력이 뛰어나 후배 법관들과 직원들의 신망이 두터운 편이다. ‘백두대간 종주모임’을 만들어 법원 직원들과 매달 전국의 산을 찾아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 부장판사는 “자기사람 관리를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노련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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