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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0 11:36 수정 : 2005.01.20 11:36

최근에는 태아동영상을 초음파 뿐 아니라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 초음파실에서 방사선과 직원이, 인터넷 태아동영상 서비스 이용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는 장면.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이슈]‘태아 성감별금지’ 위헌소송…“시대가 달라졌는데”

“임신 20주때 병원에서 정밀 초음파검사를 받았는데 태아가 ‘아빠를 닮았다’고 하네요. 아들인가 봐요.”(대전에 사는 임산부 안혜숙씨)
“7개월 즈음에 의사로부터 ‘엄마를 닳아 예쁘다’는 말을 들었는데, 14일 딸을 낳았어요.”(서울에 사는 안은숙씨)
“아들이라고 알려줬어요. 출산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출산용품을 준비하고 있죠. 태아의 성별을 알고 있으니, 여러 모로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서울에 사는 전유진씨)

출산 전까지 아이의 성별을 알려줄 수 없도록 한 의료법 19조2항이 겉돌고 있다. 현행 의료법에 따르면 의료인이 진찰이나 검사를 통해 알게 된 태아의 성별을 임부나 가족,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되고 이를 어기면 3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부는 1987년 남아 출산비율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법안을 만들었지만, 일부 산부인과 등에서는 ‘교묘한 방법’으로 태아의 성을 알려주고 있다.

태아 성감별에 대한 단속은 느슨하다. 적발 때 처벌도 솜방망이다. 의료법에 태아 성감별 금지 조항이 만들어진 뒤 법정에 선 의사는 1997년 7명, 1999년 6명, 2000년 3명, 2002년 2명 등 모두 18명이다. 게다가 이들 위법 의사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선고유예나 벌금형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적발 의사들 중 5명만이 징역 8개월과 1년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들을 포함에 의사 자격정지 또는 면허취소 따위의 행정처분을 받은 사람도 지금까지 20여명 안팎이다.


이런 가운데 현행 의료법이 헌법재판소 심판대에 올랐다. 대형로펌에 근무하는 한 변호사가 현행 의료법이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 제21조 표현의 자유 보호범위에 포함되는 ‘알권리’를 침해했다며 위헌청구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2003년 3월 결혼한 변호사 정재웅(33)씨는 결혼 4개월 만인 7월쯤 아내(28)가 임신했다. 그 뒤 정씨 부부는 ‘아들일까, 딸일까’ 궁금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출산을 한달 앞둔 지난해 12월말 정씨 부부는 아기의 옷가지 등 출산을 준비하며 아들인지, 딸인지 알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며칠 뒤 부부는 의사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지만, 돌아온 것은 법이 금지한 것이라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부부는 법을 지키는 의사가 믿음직스러웠지만, 곧 태어날 아이의 성별을 알려주지 않는 법은 지나치다고 판단했다.

“남아 출산비율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법안이 필요하지만, 임신기간에 따라서는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해요. 태아가 8~9개월 이상 성장한 뒤 낙태를 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일정 시점부터는 태아의 성별 고지를 허용해도 고의 낙태를 방지하려는 입법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한 산부인과에서 한 임산부가 진찰을 받고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87년 신설…“남아선호 엷어진 시대와 안맞는다”

정부는 강한 남아선호사상과 초음파시설 보편화로 태아 성감별에 의한 인공 임신중절이 늘어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출생성비 불균형이 심화되자 태아성감별을 금지하는 의료법을 87년 신설했다. 출생성비는 1981년 107.2, 1988년 113.3, 1994년 115.5를 기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2002년 110, 2003년 108.7로 정상성비인 105±2에 근접한 상태다.

여성의 사회진출과 저출산 위기와 맞물려 남아선호가 크게 쇠퇴하고 태아에게도 태명을 지어 ‘자식’처럼 보호하는 분위기가 확산된 탓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상황’과는 달리 ‘태아 성감별 금지’ 규정으로 인해 출산의 기쁨을 누려야 할 부부들의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는 것이 정 변호사의 주장이다. 사회구성원의 ‘의식’을 사회구성원이 만든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만큼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요지다.

“성별에 따라 아가 옷을 준비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주변에서 출산선물로 받고 싶은 것들을 물어오는데, 성별을 몰라 답변을 해줄 수가 없어요. 현행 의료법은 헌법상 과잉금지의 원칙을 위반했고, 행복추구권과 알권리를 침해했다고 본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임신 8~9개월이 지나 출산이 임박하면 아들을 선호하는 부부라도 낙태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임신 4개월 이후 성별고지를 허용한 프랑스, 미국처럼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성별고지를 허용해도 고의 낙태를 방지하려는 입법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며, 낙태관련 법을 강화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낙태를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거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만드는 등의 단서조항을 붙이면 태아성감별로 인한 낙태남용은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낙태를 하는 소수를 위해 임신한 다수의 부부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한 산부인과에서 한 임산부가 태아동영상을 보고 있는 장면.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예비부모에게 태아 성별 감추는 것은 ‘가혹한 일’”

정 변호사의 위헌소송 이후 태아성감별 금지에 대한 찬반 양론이 치열하다. 성감별을 금지하는 현행법이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것을 떠나 ‘낙태’를 막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알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남아선호사상이 뿌리깊은 사회특성을 감안할 때 현행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정 변호사의 주장에 대한 찬성은 적지 않다. 임신을 해봤거나, 임신 중인 젊은 세대 여성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진다. 남아선호사상이 예전에 비해 줄어들었고, ‘여아’이기 때문에 낙태를 선택하는 임산부가 많지 않다는 점 등을 떠나 ‘낙태’를 막기 위해 부모들의 알 권리가 침해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출산을 한달 앞둔 전유진씨는 “태아 성감별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등 법 자체가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출산 전에 태아의 성별을 알고 싶어 하는 부모들에게 성별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가혹하다”며 “또 낙태의 경우 태아성감별에 의한 것보다 ‘원하지 않는 임신’에 의한 것이 많은 상황에서 현행 의료법을 굳이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또 남아선호와 관련해 “딸이면 서운해 하고, 아들이면 기뻐하는 게 없어지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낙태를 선택하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며 “오히려 최근에는 태명을 짓거나 태교에 힘쓰는 등 태아에 대한 생각이 바뀐 만큼 법으로 태아성감별을 구별하는 구시대적 법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안은숙씨는 “남아선호사상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을 봤을 때 여아라고 해서 낙태하겠다는 엄마는 보지 못했다”며 “태아 성감별을 받아도 태몽처럼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즉 임신과 출산과정의 한 기쁨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태아 성감별을 금지하는 현행 의료법이 현실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5~6개월 되면 태동을 느끼는 등 임산부의 신체변화가 확실해진다”며 “그 상황에서 낙태를 선택하는 임산부가 있다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 것”이라고 일축했다.

임신 6개월째인 김아무개씨도 “요즘 부부들은 기껏해야 한 두 명의 아이를 낳기 때문에 임신 초기부터 태명을 짓는 등 가족의 일원으로 생명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며 “태아 성감별로 인한 낙태는 실제 벌어지고 있는 불법낙태 가운데 극히 일부이며, 단순히 낙태를 막는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남아선호 여전…태아 성감별 금지 현행 의료법 존속해야”

▲ 한 산부인과 병동의 신생아실 전경. 박승화 기자
“인터넷에서 파문을 일으킨 한 산부인과 간호사의 고백은 ‘낙태천국’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9개월에 가까운 아이들도 부모의 요구에 의해 유도분만을 통해 스스럼없이 낙태되고 있다. 특히 출생성비는 정상에 근접했지만 셋째 아기 이상의 출생성비는 136.6으로 고질적인 남아선호는 여전하다.”

반면 성감별을 금지하는 현행법을 유지 혹은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수열 세이클럽 ‘낙태이제그만’ 운영자는 19일 ▷인터넷언론 <프레시안> 기고에서 “생명경시 문화와 여야 차별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성감별 허용은 반인륜적인 여아살해 위기를 제도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임신 5개월차인 정연숙씨 역시 현행법 유지 쪽에 힘을 실어줬다. 그는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는 극소수일지라도 태아 성감별로 인한 낙태가 암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현행 의료법은 당분간 지속되어야 하며, 이와 관련한 관리감독과 처벌 또한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의사 고은광순씨는 “위헌소송을 제기한 변호사의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남아선호사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태아 성감별 금지조항은 계속되어야 한다”며 “현행 의료법의 폐지는 사회진출이나 재산의 상속 등의 면에서 여성이 차별을 받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먼저 조성됐을 때 논의되어야 한다”며 시기상조론을 폈다. 그는 이어 “매년 150만 건 이상으로 추정되는 ‘원하지 않는 임신’에 의한 낙태와 매년 3만 건으로 추정되는 ‘태아성감별’에 의한 낙태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며 “어쨌든 태아 성감별은 위법행위로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태아 성감별을 금지하는 현행 의료법이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과 '알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며 위헌소송을 낸 정재웅 변호사.
어쨌든 태아 성감별을 둘러싼 해결의 열쇠는 헌법재판소에 가 있다. 지난해 12월28일 정 변호사가 위헌소송을 청구한 이후 헌재는 이에 대한 법률적 검토에 들어가 있다. 위헌 여부에 대한 판결이 언제쯤 이뤄질지는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힘들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크거나 장래 반복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경우, 즉 ‘사회적으로 파급효과가 크고 중요한 사항’이라고 헌재가 판단할 경우 결정시기는 당겨질 수도 있다.

정재웅 변호사는 “위헌 여부 판단을 떠나 한번쯤 남아선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식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이에 대한 논란의 소지가 여전한 만큼 각하 가능성은 적어 보이지만 헌재의 결정이 어떻게 내려질지는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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