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4월 터진 재일동포간첩단 사건의 주인공인 서승(오른쪽), 서준식 형제.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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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승·준식형제 간첩사건
‘재일본 한국인 서승·서준식 형제 간첩 사건’은 정치적 목적에 따른 대표적인 ‘급조 간첩사건’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사건 발표 3년이 지난 뒤인 1974년까지도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외교 현안 가운데 하나로 자주 언급됐다 20일 공개된 19쪽 분량의 관련 외교문서를 보면, 서승 형제가 체포된 지 3년 뒤인 1974년 5월께 일본에서는 학생단체와 정치인, 문화인 등이 중심이 돼 이들 형제의 구명운동을 집중적으로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5월3일에는 사회당의 니시무라 간기치 참의원이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동생 서준식씨를 면회한 뒤 “면회 결과 고문 사실이 드러났다”며 인도적인 처우를 한국정부에 요구했다. 5월23일에는 일본 국회의원과 문화인들이 중의원 회의실에서 모여, 서승·서준식 형제의 고문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는 자민·사회·공산·공명·민사당 의원 등 당시 일본의 여야 의원 220명이 서명했다. 한국 정부도 일본 내의 이런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법무부는 같은 해 5월28일 주일 한국대사관에 니시무라 의원의 요구에 대한 회신을 보내, “서준식을 고문하거나 학대한 사실이 없다”며 “정부는 그를 학대한 사실이 없으므로 책임문제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서울대에 유학중이던 일본 교토 출신의 교포 2세인 서승(당시 25), 서준식(22) 형제는 이보다 3년 전인 71년 3월 보안사 수사관에 의해 체포됐다. 보안사는 71년 4월20일 “선거기를 틈타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암약해 온 서승, 서준식 형제 등 재일교포 출신 대학생 4명을 포함한 북괴 간첩 10명과 이들을 중심으로한 4개 망의 간첩 관련자 41명 등 51명을 서울, 부산, 제주 등지에서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서울대 유학 온 교포2세 간첩으로 급조
일 의원·지식인 "진실규명" 서명·시위
한국 법무부 "고문·학대 없었다" 발뺌
이 사건은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대결한 71년 4월 대통령선거를 한 달 앞두고 터졌다. 당시 수사관계자는 난수표 4조와 육성 녹음테이프, 공작금 350만원 등을 압수했다고 밝혔으나, “이들이 북괴 간첩 지령에 따라 움직였는지 여부는 아직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대선용 급조 사건’임을 실토했다. 증거가 부족한 수사당국은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당시 서승씨는 고문을 받다다 ‘더 이상 고문을 당하다가는 내 뜻과 달리 없는 이야기가 나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조사실 난로 기름을 끼얹고 분신을 시도하다 화상을 입었다. 이런 사정이 전해지자 일본에서는 서씨 형제에 대한 고문 중단과 사면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본에서 벌어졌다. 한편, 일본 내의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서승씨와 서준식씨는 유신정권이 무너진 한참 뒤에야 석방됐다. 형 서승씨는 사형 판결을 받고 복역하던 중 무기, 20년 징역으로 차례로 감형됐다가 90년 2월 가석방됐다. 석방 뒤 서승씨는 “민족의 참모습을 알고 싶어 북한에 간 적은 있으나 간첩공작 교육을 받지 않았고 국가기밀을 북에 보고한 적도 없고 노동당에도 절대 가입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동생 서준식씨는 72년 5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판결을 받았으며, 78년 형기 만료 뒤에도 사상전향을 거부하는 바람에 보안감호 10년 처분을 추가로 받아 88년 5월에야 석방됐다. 그뒤 서준식씨는 국내에서 인권 운동을 펴고 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군사정부 진실은폐 시도 드러나”
■ 서승 리쓰메이칸대 교수 인터뷰 “한국 민주화 실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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