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을들’ 지금 안녕하십니까
⑧못다 한 이야기
지난해 ‘을’들의 하소연이 봇물을 이뤘다. 남양유업 사태가 불을 붙였다. 남양유업 경영진은 지난해 고개를 숙였다. 이후 편의점주, 비정규직 대학강사, 대리기사, 드라마 보조출연자 등 수많은 ‘을’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른 ‘갑’들도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정치권에서도 갑을관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해가 바뀌었다. <한겨레>는 지난 한해 보도한 ‘을’들을 올 초부터 만나 “안녕들 하신지” 물었다. 사회적 관심은 뜨거웠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공약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뒤 을의 아우성도, 갑의 사과도 함께 사라졌다. 도리어 안부조차 물을 수 없게 된 ‘을’들이 훨씬 많았다. 그들은 문 뒤에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한겨레>가 지난해 8월 보조출연자들을 취재하며 만난 김아무개(51)씨는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나 만날 수조차 없었다. 김씨의 어머니는 “촬영을 간다고 죽기 전날 밤 9시 집을 나섰다. 다음날 경찰은 술을 많이 마셔 심장이 부어서 죽었다고 했다. 아들은 술을 못 먹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 보조출연 일도 없고 다르게 먹고살 방법이 없어 친구들에게 늘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또다른 보조출연자 김아무개(32)씨는 “경북 문경으로 사극 촬영을 나가 있다.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른다. 촬영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보조출연자들은 여전히 전날 밤에야 다음날 일정을 알 수 있었다. 한 보조출연자와는 다섯차례 약속을 잡았지만 촬영 일정 때문에 모두 취소됐다.
대리점·편의점을 운영했던 ‘을’들은 가게 문을 닫거나 회사와 합의했다. 공장에서 일한 돈을 모두 쏟아부어 편의점을 차렸지만 1년 반 만에 6500만원의 빚만 얻어 폐업신청을 했던 편의점주 이아무개(44)씨는 결국 가게 문을 닫았다. 이씨는 최근 통화에서 “편의점은 오래전에 정리했다. 몸이 아파 모든 일을 쉬고 있다. 더는 편의점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며 전화를 끊었다. 화장품 회사의 대리점주인 서아무개(49)씨는 “협상중인데 회사에서 언론에 기사가 나가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여러 쟁점 사항에 대해 회사가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일단 계속 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는 짧은 말만 남겼다.
“내일 일정 오늘밤에야 알아” 보조출연자 약속 5번 ‘펑크’
못먹는 술 먹고 세상 등지기도
화장품 대리점주 “협상중이라…”
문닫은 편의점주 “얘기하기 싫다”
전문가 “재발방지 제도화해야
경제민주화 공약 파기 안될 말”
한 주류업체의 대리점주는 “회사와 협의를 마치고 제도 개선은 안 된 부분이 있지만 일정 정도 피해보상을 받았다”는 통화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비정규직 대학강사인 윤아무개(55)씨는 “강사들에 대한 관심이 고맙긴 했지만 처우가 바뀐 것은 없었다. 하지만 대학 사회가 좁은 곳이라 적극적으로 우리 상황을 말하기 부담스럽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을’들은 이제 하소연조차 못하고 있지만 정부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추진할 의지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6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경제’라는 단어를 24차례나 언급했지만 후보 시절 핵심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민주당은 ‘갑으로부터 을을 지키겠다’며 지난해 을지로위원회를 만들었다. 우원식 을지로위원장은 “을지로위원회가 지난해 21건의 갑을 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었다. 갈등을 직접 해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회에서 다양한 입법 활동을 해나간 것은 성과라고 본다. 하지만 고통받는 을들이 너무 많아 모든 곳을 찾아갈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올해는 갑을 문제의 제도적 개선을 위한 입법 및 정책 활동에 집중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개별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은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면 없던 일이 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제도적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도 경제민주화 공약을 박근혜 정부가 사실상 파기하면서 쉽지 않은 상황으로 가고 있다. 결국 ‘을’들에게 관심이 없는 정부·여당에는 기댈 것이 없다. 재벌·대기업이 지난해 ‘을’을 대화 상대로 인정한 것은 ‘을’들이 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 연대의 경험을 더욱 확대하는 것이 갑을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환봉 서영지 방준호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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