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11 07:08
수정 : 2019.04.11 14:09
이승만 임시정부 국무총리 추대 놓고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자가 수반이라니”
이회영·신채호·박용만 등 거센 반대
외교독립론 기대와 기호파 지지로 선출
<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
이승만 국무총리 추대를 강하게 비판한 신채호. <한겨레> 자료사진
|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선 정당론과 정부론, 국내파와 국외파의 갈등 못지않게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싼 내홍도 치열했다고 한다. 사실상의 식민지배인 위임통치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청원한 이승만(44) 박사를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앉힐 수 없다는 거센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10일 밤, 중국 상해 불란서 조계지에서 열린 임정 수립 대표자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국호를 ‘대한민국’, 관제를 총리제로 택한 뒤 국무총리 인선에 착수했다. 먼저 일본 조도전대학 출신의 신석우(25)씨가 한성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선출된 이 박사를 국무총리로 뽑자고 제안하였다. 이때 무장독립운동을 벌여온 이회영, 신채호(39), 박용만(38) 등의 인사들이 반대 의사를 피력하고 나섰다. 특히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 출신의 신채호씨가 “이승만은 위임통치를 제창하던 자이므로 국무총리로 신임키 불능하다”며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라고 강하게 비난하였다. 박용만은 이승만을 미국 하와이에 정착하도록 도와준 인물로 한때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
한때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었지만 반이승만 노선에 앞장서게 된 박용만. <한겨레> 자료사진
|
이들의 거센 항의에 장내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조소앙(32)씨가 절충안을 내놓았다. 후보자 3인을 추천하여 투표하자는 의견이 그것이었다. 이 박사와 함께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거물로 꼽힌 안창호(43)씨와 민족진영의 어른 이동녕(50) 선생 등 3인이 거론되었으나 결과는 ‘이승만 총리’였다. 윌슨 대통령 등 미국 정치권과의 학연과 남다른 인지도, 참석자의 절반 이상이 이 박사와 같은 기호 출신이었던 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이 박사가 총리로 선출되자 반대파 3인은 회의 장소를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앞선 3월3일, 이 박사는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위임통치’하여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바 있다. 비록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단서를 달기는 하였으나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 등의 내용 때문에 식민통치를 자처했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이 박사의 위임통치론이 임정 수립 과정에서 자격 논란으로 비화한 셈이다.
이 박사가 임시정부의 초대 총리로 추대되었다는 사실은, 외교독립론의 기대가 만연한 상해에서 아직 위임통치 청원 문제는 큰 논란거리로 부각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외세 의존적 태도 등과 더불어 군주적 권위의식으로 충만한 이 박사가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임시정부의 초대 대표가 되면서, 임정 내 갈등의 불씨가 재점화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 박사는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다.
△참고문헌 오영섭,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위임통치 청원 논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2012)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