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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1 09:20 수정 : 2020.01.11 09:39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지난달 29일 대구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고공농성중인 해고노동자 박문진씨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대구/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김진숙 지도위원 인터뷰

고공농성 친구 박문진 만나러
암 투병 중 110여㎞ 도보행진

“길에서 싸우거나 단식하거나
극단으로 내몰리는 노동자들
어느 정권 돼야 사라질까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지난달 29일 대구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고공농성중인 해고노동자 박문진씨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대구/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김진숙(60)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박문진(59) 간호사(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를 만난 뒤 힘이 난다고 했다. “암 환자가 되고 보니 자신감이 떨어지고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웠어요. 내 상태를 누군가 확인하고, 보게 되는 게 좀 그렇고…. 그런데 이번에 다녀오고 나니 마음이 많이 회복되더라고요.”(지난 6일 <한겨레>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김진숙은 2018년 10월 유방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다. 지난달 22일 트위터에 “항암 후유증, 우울증, 지인 기피증,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관절통까지 풀옵션으로 앓는 중이나 (중략) 앓는 것도 사치라 걸어서 박문진에게로 갑니다”라고 쓰고는, 다음날 오랜 친구를 찾아 떠났다. 경남 양산시 부산도시철도 호포역 근처에서 홀로 시작한 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10여㎞를 걸어 지난 29일 대구 영남대의료원에 이르렀을 땐 200명으로 늘었다. 그 ‘연대의 길’에서 김진숙은 위로를 받은 듯했다.

그가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지난해 10월 초, 박문진의 고공농성이 100일로 접어들 무렵이다. “나한테는 각별한 친구이고, 옥상에 올라갔을 때 굉장히 놀랐어요. 그게 어떤 상황인지를 아니까요. 마음이 너무 아픈데 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100일이 돼오면서 상황이 길어지겠다는 판단이 들었죠.”

걷는 연습을 시작했다. 길게는 30일 정도 걸릴 거라 예상하고, 날마다 조금씩 시간도 늘리고 거리도 늘렸다. “타결될 것 같으면 대부분 100일 이전에 돼요. 100일이 넘어가면 위에 있는 사람도 정말 힘들어요. 결단하고 올라갔는데 세상은 별로 관심 없고, 사쪽도 별로 변화가 없고, 힘든데 힘들다고 말도 못 하니 더 힘들어요. 나라도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걸어가기로 한 거죠.”

둘은 영남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며 만났다. 김진숙이 1993년 부산노동자연합 의장 시절 동래봉생병원 노조 활동을 도울 때 대구 영남대의료원 노조위원장이었던 박문진과 자연스레 알게 됐다. 한살 터울인 두 여성 노동운동가는 금세 친구가 됐다. “박문진은 낙천적이고 밝아요. 맥힌 데가 없어요. 노조 사무실에서 정문 로비까지 나가는 데 한시간이 걸리더라고요. 사람들과 인사하느라고요. 사람을 품을 줄 알아요. 저는 사람에 대해선 좀 모난 데가 있거든요(웃음).”

김진숙은 2011년 자신이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에서 농성할 때 경기도 평택에서 400㎞를 걸어와 힘을 주었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생각했다고 한다. 약 한 봉지와 한끼 먹을 것, 지도 앱이 깔리지 않는 전화기, ‘힘내라 박문진’이라고 쓴 작은 손팻말만 들고 나섰다. 첫날(12월23일)은 길을 몰라 엄청 헤맸다. 다음날부터 사람들이 찾아왔고, 함께 걸으면서는 한번도 길을 잃지 않았다.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 동료들, 케이티엑스 승무원들, ‘밀양 할매’(밀양송전탑반대주민대책위원회), 고리원전 반대 주민들 등이 함께 걸었다.

김진숙씨가 지난달 28일 도보행진 길에 찾아온 케이티엑스(KTX) 승무원들과 밝게 웃고 있다. 김진숙씨 제공

둘째 날인 크리스마스이브에 들려온 쌍용차 노동자들의 ‘무기한 복직 연기’ 소식에 그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맺은 노사합의를 저리도 쉽게 찢어발기는 자본. 노동자들에게 대화로 해결하라고 말하지 마라. 대화를 회피하고 합의를 깨는 건 늘 사측이었고 늘 극단으로 내몰아왔다. 하. 정말 억이 막혔다”고 트위터에 썼다. “마음이 정말 아파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뒤 노동문제의 획기적인 전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고공에 올라가거나 단식을 하거나 길에서 외롭게 싸우는 노동자들은 없어질 줄 알았어요. 노동자들은 어느 정권에서 존중받을 수 있을까요.”

70m 높이 옥상에서 손을 흔드는 친구를 보고 그는 왈칵 눈물을 쏟았더랬다. “오랜 친구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 막상 올라가서 얼굴 보니까 할 얘기는 별로 없더라고요(웃음).”

그는 이번 여정에서 만난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이 누구보다 반가웠다고 했다. 2006년 5월 해고 뒤 13년 복직 투쟁을 한 그들을 많이 만났었지만, “그렇게들 밝은 표정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은 2018년 7월 복직에 합의해 그해 11월 일터로 돌아갔다.

“노동조합을 하면 마치 회사가 망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게 갈등의 시작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노조는 당연히 탄압해야 하고 없애야 하고 해고시켜야 하는 게 돼요. 근데 그런 거 아니잖아요? 케이티엑스 노동자들한테 다른 동료들이 ‘13년 동안 싸웠다고 해서 뿔 달린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하더래요. 그 친구들 일 잘하고 있고, 표정이 너무 밝아졌어요. 13년을 길에서 울고불고 싸우게 만드는 문화는 정말 잘못된 거예요. 노조가 건강할수록 회사도 튼튼해지고 부정부패도 줄어요. 노조 한다고 탄압하고 해고시키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가 정말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박문진의 복직 투쟁도 14년째로 접어들었다. 김진숙이 크레인에서 입었던 빨간 패딩 점퍼를 건네받아 입고 진행 중인 고공농성은 다음주면 200일이 된다. 두 사람이 같은 옷을 입은 게 처음이 아니다. 박문진은 크레인에 있던 김진숙에게 오리털 패딩 바지를 가져다준 적이 있다. “엄청 따뜻했어요. 그런데 2012년에 박근혜 집 앞에서 농성할 건데 서울이라 엄청 추울 것 같으니 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옥상에서 내려와서 패딩 점퍼 돌려달라고 복수를 했죠(웃음).”

김진숙은 박문진에게 신발도 사달라고 했다. “이번에 걸어오느라 새로 산 신발이 다 떨어졌다. 내가 여까지 왔는데 니가 그 정도는 해줘야 안 되겠나” 하면서. 그리고 둘은 새 신을 신고 평소 같이 가자 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기로 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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