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16 16:20
수정 : 2005.02.16 16:20
나는 고 육영수 여사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가 돌아가신 다음에 출생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영부인으로서, 사회사업 활동가로서 존경받았다는 것, 최근 ‘오발탄 논쟁’의 주인공이라는 것 정도랄까. 그래도 다행이다. ‘복학생 스타일’의 박근혜 대표가 있으니까. 요새 <개그 콘서트> 복학생이 2030세대의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 일으켜주듯이, 박 대표도 중장년층 세대에게 복고의 즐거움을 주고 있다.
200만 명의 조회수를 훌쩍 넘은 그의 미니 홈피에 한번 가보자. 외형상 신세대 풍의 홈피에 드리워진 것은 육영수 여사의 낡은 그림자다. 육 여사의 머리 스타일을 표절한 박 대표의 사진, 앞치마를 두른 채 영아원 아이들을 돌봐주는 감성적 이미지에 팬들은 육 여사와 착시 현상을 일으키고 ‘박근혜 만세!’를 외친다. 이렇듯 그는 자신만의 정치적 비전을 세우기보다 부모님의 부드럽고 강한 카리스마를 시의적절하게 차용하는 데 능하다. 지난 총선 때 탄핵 역풍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역주의를 부활시켜 승리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대학으로 치면, 재수강으로 학점 올리는 데 선수인 학생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에게 닥친 것은 무엇인가? 정치 철학이 부재한 그에게 보수 세력들마저 등을 돌리고 지지율이 하락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최근에는 한나라 당 내에서도 반박, 찬박 등으로 갈려 박근혜 대표의 당내 입지마저 흔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그의 시대가 무너진다고 하기엔 이르다. 오히려 어머니의 치마저고리와 아버지의 긴 칼을 빌려 차고 있는 한 그의 상황은 아직 유리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 그 사람들> 일당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고 사랑하는 어머니 역시 예쁘게 부활하셔서 그를 다시금 정치적 희생자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입심 좋기로 유명한 한 변덕쟁이 여성 테러리스트는 아예 박 대표의 곁에서 효녀 심청이 되느니 차라리 논개가 되겠다고 나선 마당이다. 그렇다면 박 대표에게 밀린 방학 숙제는 없는가?
아쉽게도 아니다. 복학생이라고 늘 재수강만 열심히 하란 법은 없다. 학점에 ‘펑크’가 나더라도 새로운 과목을 들어야만 살아남는 시대 아닌가. 과목이라고 해봐야 그다지 많지는 않다. 기껏해야 설득의 리더십, 지역주의 탈피, 말과 행동의 일치, 철학과 비전 갖추기, ‘엄마 아빠 어부바’에서 내려오기 정도다. 개학(어쩌면 개혁)이 얼마 안 남았다. 숙제 끝내 놓고 새로운 수업을 들으러 가는 복학생 박근혜를 보고 싶다.
권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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