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2.16 16:23 수정 : 2005.02.16 16:23

호주제 헌법불합치 판결을 이끌어낸 두 남자. 이석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왼쪽)과 최재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고교 시절부터 친구인 두 사람은 “호주제 폐지는 여자보다 남자에게 좋은 일”이라며 입을 모았다. 김태형 기자



고교·대학친구 이석태 민변회장-최재천 교수

지난 2일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오기까지 견인차 구실을 한 두 ‘남자’가 있다. 이석태 변호사와 최재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여성계에선 모르는 이가 없다. 하지만 이들이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닌 친구 사이란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회장인 이 변호사는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과 함께 지난 2000년 호주제 위헌소송을 제안하고 결론을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조숙현, 김수정, 진선미, 이정희 변호사 등 젊고 패기있는 여성변호사들을 내세워 변론을 진행하면서 본인은 정작 뒤에서 보이지 않게 이들을 떠받쳤다. “감독은 훌륭한 배우와 작품을 만들면 그 뿐”이라는 그가 발굴한 또 한명의 ‘배우’가 바로 최 교수였다. 최 교수는 호주제 위헌여부를 가리는 마지막 공개변론에 나가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위헌론쪽 참고인으로 나온 그는 재판정에서 “부계혈통주의는 생물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술해 폐지의 과학적 근거를 내놓았다.

이변호사가 최교수 ‘캐스팅’

그 뒤에는 4년 전의 약속이 있었다. 이들이 청년시절을 지나 20여 년만에 다시 만난 건 지난 2000년. 시대가 먼저 이들을 불러들였다. 그해 1월 이 변호사는 강 전 장관과 함께 제주인권학술회의에서 ‘호주제 폐지를 위한 법적 접근’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같은 달 최 교수는 교육방송에서 ‘여성의 세기가 밝았다’란 주제로 모든 생물의 세계에서 주체가 암컷이라는 내용의 특강을 하고 있었다. 이 변호사가 때를 놓치지 않았다. 오랜 친구인 최 교수를 찾아가 “위헌소송을 하게 되면 증언을 해달라”고 제안했다. 최 교수도 흔쾌히 동의했다. 마침 그는 남성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있었다.

“욕설이 섞인 남자들의 전화가 수도 없이 걸려왔어요. 이래서 문제가 되는구나 싶었죠. 그 뒤 여성들한테 전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엉엉 울면서. 사십몇년 동안 묵은 체중이 날라갔다는 얘기예요. 아, 이거 해야 되는구나 싶었죠.”

“저도 창조의 씨앗을 품어 배양하고 키우는 근원은 결국 여성이라고 봤습니다. 모성의 중요성이 강조되면 사람들이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최 교수의 주장은 여성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니까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죠.”

결론은 ‘소송’이었다. 결판이 나야 하는 진검승부였다. 실패의 위험도 있었지만 이 둘은 ‘확신범’이었다. 기실 가설을 세우고 객관성과 합리성을 무기로 증명을 해나가는 이들의 길은 서로 닮아있었다. 마치 과학자가 충분한 실험과 관찰을 거치듯, 변호인단은 처음부터 방대한 분량으로 호주제의 불합리성과 위헌성에 대한 근거를 작성했다. 이 변호사는 그대로 각종 매체에 호주제의 위헌성을 알리는 기고문을 보냈고, 최 교수는 법조인 상대의 각종 강연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생물학적 견해를 펼쳤다. 불이 붙었다. 최병모 전 민변회장이 변론에 직접 나서 힘을 보탰다. 호주제폐지 운동본부와 137개 시민단체가 모여 연대틀을 꾸리고, 국회에서는 대체입법안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최 교수가 다시 결정타를 날렸다. 그는 헌재의 마지막 변론에서 “우리 족보와 반대로 생물학적인 족보는 암컷, 즉 여성의 혈통만을 기록한다”고 말해 호주제에 미련을 못 버린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설상가상 미국 배우 데미 무어의 임신 9개월 누드 사진을 슬라이드로 비춰가며 “아름답지 않느냐”고 말해 지켜보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실은 ‘전략’이었다.

“재판관들이 많이 존다고 하더라구요. 흔들어 깨우는 걸 하나 하면 좋겠다 싶어 내 방식대로 그냥 밀어붙이기를 한 거거든요. 원래 재판정에서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며?”

“자주 벌어지는 일은 아니지. 외국에선 차트도 보여주고 하지만 상당히 우리나라에선 고답적이거든요. 과학적 설득력을 동원한 아주 좋은 생각이었지요.”

둘은 어떤 면에서 같은 ‘진화론자’인 듯도 했다. 인간 사회나 동물의 세계 모두 진화하고 변화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 교수도 사실 개인적인 ‘진화’의 진통을 겪었다. “최영 장군으로 유명한 철원 최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대학 시절 여자 친구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것조차 싫어했을 정도로 “골수 마초”였다고 했다.

“남성들이 되레 만세불러야”

“동물 세계는 완전히 암컷 세상이란 말이죠. 인간과 별개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결혼해서 설겆이를 ‘해주다가’ 이게 왜 아내 일인가 싶더라구요. 자연스럽게 내가 관찰하던 동물과 내 삶이 만난 거였죠. 인간만 이상한 동물이구나 하는 자성이 일었습니다.”

이 변호사 역시 법률가의 역할에서 출발해 사회를 만난 뒤 다시 법정으로 돌아왔다. 진화를 앞당기는 길이 아무리 멀고 험난하더라도 결국 사회는 발전한다는 낙관론을 그는 갖고 있었다.

“법률가로 가급적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그 가운데 하나가 남녀평등이었습니다. 일본도 없앤 호주제를 우리가 갖고 전통이니 하면서 늘어지는 게 안타까웠죠. 가족이 수평적인 관계를 갖추면 수직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질서로 일관해온 사회에 엄청난 질적 변화가 올 거예요. 호주제 폐지가 기준점이 됐다고 봅니다.”

이 변호사는 “성이 사회생활하는 제약조건이 안된다는 시대가 비로소 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 교수도 “이번 판결로 남성들이 오히려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맞장구쳤다.

“여성들은 기껏해야 평등을 얻은 거고 남성들은 기가 막힌 세상이 와서 춤춰야 하는 상황인데 말이지. 여자가 돈 벌고 남자가 아이 키우는 무한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데. 그러면 ‘왕따’ 시키잖아. 다른 걸 포용해야지. 아프리카 종족들에게도 사냥 못하는 이들에게 잡은 고기를 나눠주는 ‘깍두기’가 있거든요.”

평생 가부장에 기대 살아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 할 이는 없었으련만, 두 사람 모두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인문학적 관심이 많았던 이들은 한 때 문학청년의 꿈을 꾸기도 했다. 실지로 이석태 변호사는 헬렌 니어링의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보리)를 번역했고, 최 교수는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궁리) 등의 책을 썼다. 어쩌면 진실에 등돌리지 않으려는 두 사람의 노고는 한줄이라도 필연이 되길 바라는 작가의 고뇌와 그다지 멀지 않은 듯도 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감독:이석태 소송단 떠받치며 위헌성 홍보온힘

이석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1953년생. 법무법인 덕수 소속 변호사.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 동성동본 불혼 헌법소원 사건 등 굵직굵직한 주제들을 다뤘다. 환경운동연합 상임집행위원, 녹색교통운동 공동대표를 지냈고 노무현 정부 출범 뒤 첫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을 맡았다.

명배우: 최재천 부계혈통 허구성 생물학으로 논증

최재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1953년생. 79년부터 94년까지 미국에서 동물생태학을 공부한 뒤 하버드대 전임강사와 미시간대 조교수로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각종 강연과 저술로 자연과학과 사회의 접목을 시도중이다. 2004년 ‘올해의 여성운동상’(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여성재단) 을 받았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