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23 16:10
수정 : 2005.02.23 16:10
‘위인’이 되어버린 사람과 친해지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문자로 정착되고, 문자의 세계 속에 갇혀버린 삶은 때때로 화석이 되어 껍질로만 존재한다. 유관순. 그는 교과서에 위인전에 기념관에 존재하지만 사실 어디에도 없다. 남동순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하얀 장갑을 끼고 딱딱한 유관순의 빗장뼈를 솔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울 강북구 우이시장 골목 안에 살고 있는 남동순 할머니는 올해 103살이다. 그는 돋보기를 끼고 책도 잘 읽고, 한 대학에서 주최한 유관순 관련 세미나에 참여해 세 시간이 넘도록 꼿꼿하게 앉아 발제자들의 발표를 경청했으며, 약속시간도 잘 기억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103살 할머니로부터 90년 전의 기억 속에서 찾아낸 관순은 소꿉친구였다. 그러므로 유관순이 살아있다면 그 역시 103살이 되어 있을 것이다. 풀각시를 만들며 놀던 어린 시절 기억 속의 관순이는 새암도 많고 욕심도 많던 찰지고도 총명한 아이다. 사방치기를 하고 놀다 계집애들이 그런 놀이를 하며 논다고 할아버지에게 혼이 나던 관순, 90년도 더 전에 병천 들판을 뛰어다니던 씩씩한 소녀 관순이 남동순 할머니의 기억 속에 살고 있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에는 참으로 많은 조선의 여성들이 참여하였다. 관순과 동순 역시 격정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감옥 속에서 관순은 숨을 거둔다. 그 이후 동순은 7인 결사대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한다. 연해주와 몽고로 독립자금을 전달하러 가기도 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때로는 무장투쟁까지. 그의 말대로라면 “교복도 안 벗고 시작한 독립운동을 종횡무진 최선을 다해” 한다. 그렇게 시작한 독립운동은 1945년 8월14일까지 계속됐다. 해방을 맞았을 때 소녀 동순은 어느덧 중년이 돼 있었다. 그야말로 독립운동에 삶을 바친 셈이다. 만약 유관순이 살아 있었다면 그 역시 비슷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이후에도 동순은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기르는 일에 남은 삶의 대부분을 바친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 미래를 결정짓는다는 신념에 따른 일이었다. 그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았다.
무장독립투쟁이라든지 유관순에 대한 기억이라든지 사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그런데 103살 남동순 할머니에게는 그 시절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에 대한 기억이 더 선명했다. 누르스름한 배추죽, 솔잎과 콩을 넣고 끓인 풀비린내나던 죽, 싸릿가지 젓가락…. 그의 머릿속에 푸르게 살아있는 기억. 하긴 누가 그 기억이 독립무장투쟁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할 것인가.
글 김현아/나와 우리 운영위원
khagong@empal.com·사진 류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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