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소녀 백서’ 펴내 <네 멋대로 해라>(1999, 한겨레신문사)로 일약 인기작가 반열에 올랐던 김현진(24)씨.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아니 아주 조금 변했지만 그는 완전히 변해 ‘어른’이 됐다. 이제는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가족과도, 스스로 비난하며 자학의 몸부림을 그치지 않던 어린 시절과도 화해했다. 하지만 불화는 계속된다. 여전히 ‘참한 여자’는 최고의 며느릿감이고, ‘못 된’ 이혼녀들 때문에 호주제를 없애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드높고, 길거리에서 담배피우던 여자가 얻어맞기도 한다. 그래서 <불량소녀 백서>(한겨레신문사)를 펴냈다. 자신처럼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는 여성 후배들을 위한 지침서 또는 10대를 넘어 이제 20대 중반이 된 한 ‘여성’의 좌충우돌 성장기라고나 할까. “남이 바라는 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불량소녀’라고 이름지었어요. 용감하고 씩씩하게 자기 몫을 하면서 남에게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라는 뜻이죠.” 그가 ‘나만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영화를 만들다가 학교의 반대에 부딪쳐 자퇴했다. 보수적인 교단의 목사인 아버지는 그의 뜻을 꺾지 못한 채 결국 “네 멋대로 해라!”고 선언해버렸다. 그 뒤 내내 생활고와 싸웠다. 원고를 써 돈을 벌어 학비를 대고 경제적으로 무력한 부모님을 부양했다. 유수 잡지의 최연소 필자, 최연소 영상원 입학자, 최연소 문화관광부 청소년 자문위원…, 세기조차 어려우리만치 많은 ‘최연소’ 딱지도 달았다. 이런 닉네임은 영광뿐 아니라 상처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대접하는 반면 또 무시했다. 어리다는 이유로, 또 여자라는 이유로. “내뜻대로 인생개척 그게 바로 불량소녀” “어린 여자들에게 야비한 말을 해 상처주려는 사람들은 남을 불행하게 해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단 한번뿐인 인생, 결정과 책임을 스스로 신중하게 지면서 용감하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이 답지 않게 노숙한 그의 ‘직접화법’은 듣는 이를 무안하게도, 겸연쩍게도 만든다. 이런 특유의 화법으로 그는 여자 후배들에게 주는 충고를 몇가지로 묶었다. △미모를 팔아 남자의 부와 권력을 얻는 대신 스스로 경제권을 가져라 △잠시 고독을 달래려고 남자를 찾지 말라 △자본주의의 잣대가 아닌 자신만의 잣대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꿔라 △남자의 거짓말에 속지 말라 △나쁜 남자를 멀리 하라 △내 밥은 내가 벌어먹는다는 철칙을 기억하라. 18살 때부터 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밥값’을 번 그는 특히 여성이 자신을 상품처럼 팔아넘기지 않길 바란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소녀들의 돈만 원할 뿐 행복을 바라지는 않아요. 소녀들의 불만족을 재생산 하려고만 할 뿐이죠. 세상에 공짜는 없고, 불량소녀는 나를 파는 짓은 하지 않아요. 자기가 먹은 밥값은 자신이 내야죠.”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여성 |
‘네 멋대로 해라’ 작가 김현진씨 ‘불량소녀’ 되어 돌아왔네 |
‘불량소녀 백서’ 펴내 <네 멋대로 해라>(1999, 한겨레신문사)로 일약 인기작가 반열에 올랐던 김현진(24)씨.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아니 아주 조금 변했지만 그는 완전히 변해 ‘어른’이 됐다. 이제는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가족과도, 스스로 비난하며 자학의 몸부림을 그치지 않던 어린 시절과도 화해했다. 하지만 불화는 계속된다. 여전히 ‘참한 여자’는 최고의 며느릿감이고, ‘못 된’ 이혼녀들 때문에 호주제를 없애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드높고, 길거리에서 담배피우던 여자가 얻어맞기도 한다. 그래서 <불량소녀 백서>(한겨레신문사)를 펴냈다. 자신처럼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는 여성 후배들을 위한 지침서 또는 10대를 넘어 이제 20대 중반이 된 한 ‘여성’의 좌충우돌 성장기라고나 할까. “남이 바라는 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불량소녀’라고 이름지었어요. 용감하고 씩씩하게 자기 몫을 하면서 남에게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라는 뜻이죠.” 그가 ‘나만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영화를 만들다가 학교의 반대에 부딪쳐 자퇴했다. 보수적인 교단의 목사인 아버지는 그의 뜻을 꺾지 못한 채 결국 “네 멋대로 해라!”고 선언해버렸다. 그 뒤 내내 생활고와 싸웠다. 원고를 써 돈을 벌어 학비를 대고 경제적으로 무력한 부모님을 부양했다. 유수 잡지의 최연소 필자, 최연소 영상원 입학자, 최연소 문화관광부 청소년 자문위원…, 세기조차 어려우리만치 많은 ‘최연소’ 딱지도 달았다. 이런 닉네임은 영광뿐 아니라 상처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대접하는 반면 또 무시했다. 어리다는 이유로, 또 여자라는 이유로. “내뜻대로 인생개척 그게 바로 불량소녀” “어린 여자들에게 야비한 말을 해 상처주려는 사람들은 남을 불행하게 해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단 한번뿐인 인생, 결정과 책임을 스스로 신중하게 지면서 용감하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이 답지 않게 노숙한 그의 ‘직접화법’은 듣는 이를 무안하게도, 겸연쩍게도 만든다. 이런 특유의 화법으로 그는 여자 후배들에게 주는 충고를 몇가지로 묶었다. △미모를 팔아 남자의 부와 권력을 얻는 대신 스스로 경제권을 가져라 △잠시 고독을 달래려고 남자를 찾지 말라 △자본주의의 잣대가 아닌 자신만의 잣대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꿔라 △남자의 거짓말에 속지 말라 △나쁜 남자를 멀리 하라 △내 밥은 내가 벌어먹는다는 철칙을 기억하라. 18살 때부터 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밥값’을 번 그는 특히 여성이 자신을 상품처럼 팔아넘기지 않길 바란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소녀들의 돈만 원할 뿐 행복을 바라지는 않아요. 소녀들의 불만족을 재생산 하려고만 할 뿐이죠. 세상에 공짜는 없고, 불량소녀는 나를 파는 짓은 하지 않아요. 자기가 먹은 밥값은 자신이 내야죠.”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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