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1.26 18:38
수정 : 2007.02.0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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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낑낑 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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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5시부터 시계살피며 불안
허겁지겁 어린이집 도착해선
“선생님 또 늦었죠?”
사회도 남편도 육아지원 생색만
작장여성 24시 빠듯하고 숨차
회사 출자 어린이집등 모색해야
[육아 ‘낑낑’ 백서] 1. 워킹맘 ‘공포의 시각’
세계에서 가장 낮은 한국의 출산율이 가까운 미래에 ‘재앙’으로 다가오리란 전망을 부정하는 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꺼리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신혼부부들 역시 점점 아이 낳기가 두렵다고 합니다. ‘자녀의 수가 부의 척도’라는 우스개소리가 더는 우습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를 앞장서 풀어야 하는 곳은, 결국 정부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낳지만 키우는 건 사회의 몫입니다. 하지만 정부의 출산장려정책은 육아 현장에서 부모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한겨레>는 요즘처럼 아이 키우기 힘든 시대의 풍경들을 들여다보는 기획 연재를 시작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야기들, 또 조금만 바꾸면 아이 키우기가 훨씬 편해지는 제안도 담을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경험담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기다립니다. 편집자
soulfat@hani.co.kr
승연엄마 “5시 넘어선 누가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덜컹”
## 승연(4살)이 엄마 최지영(33)씨의 혼잣말(최씨 인터뷰를 재구성한 글임)
오후 5시. 지금부턴 박 부장의 시선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사소한 지시라도 받게 되면, 제 시간에 퇴근하기 힘들어진다. 남의 자리에서 울리는 전화도 되도록 대신 받지 않는다. ‘애 키우는 내 사정 이해한다’던 동료들의 시선이 점점 싸늘해지는 것 같다. 낮에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맘을 다잡지만, 젠장, 몸은 왜 이리 피곤한지. 새벽에 일어나 아이 밥먹이고 어린이집 등원시킨 뒤 출근하면 오전부터 졸음이 쏟아지는 걸 어떡하냐고~. 5시50분이 가까워 오면서, 누가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오후 6시. 도망치듯 사무실을 뛰쳐나간다. 7시까지는 어린이집에 도착해야 한다. 지하철역까지 5분, 지하철 30분, 마을버스 10분. 부리나케 달려도 6시50분 도착이다. 마을버스가 조금 늦거나 차가 막히면 7시 넘기기 일쑤다. 어린이집 교사들에겐 난 상습적인 ‘지각생’이다.
밤 12시. 저녁 내내 아이와 씨름했는데, 남편은 술에 취해 들어왔다. “저녁 6시에 퇴근하면 회사에서 짤린다”는 게 남편의 항변이다. 술 취해 자는 남편을 보면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요즘엔 엉덩이를 패주고 싶을 때가 훨씬 많다. 집안일을 더 많이 도와달라고 남편을 설득하는 건 포기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요즘엔 둘째 낳자는 소리는 안한다.
워킹맘(일하는 엄마, working mom)에게 오후 5시는 고통의 문이 열리는 시간이다. 대부분의 워킹맘들은 최씨처럼 오후 6~7시면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의 종일반에서 데리고 와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퇴근시간과 어린이집 끝나는 시간은 비슷하다. 퇴근한 워킹맘들은 ‘축지법’을 쓰거나 ‘공간이동’을 해야 할 판이다. 집 주변에 아이를 데려다 보살필 친지나 도우미가 없다면, 단 30분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에게 중요한 일이나 약속이 겹치는 일이 왜 없겠는가? 당연히 신경전이 벌어지고 부부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양보는 대부분 엄마의 몫이다. 워킹맘이 직장에서 설 자리가 점차 작아진다. 아예 오후 5시~8시 사이에 아이를 돌봐주는 별도의 보모를 구하는 워킹맘도 많다. 당연히 돈이 2배로 들어가고, 월급 받아도 남는 게 없다.
공립이나 시립유치원 가운데 밤 10시 정도까지 야간보육을 하는 곳이 있긴 하다. 하지만 숫자도 많지 않을 뿐더러, 대기자가 많아 좀처럼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기 어렵다. 경기도와 서울시가 맞벌이를 위한 시간연장형 보육시설을 2010년까지 대폭 늘리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당장 급한 워킹맘들에겐 아직 먼 얘기다. 무엇보다 엄마들은 “아이한테 미안해서 도저히 보육시설에 12시간 가까이 맡겨둘 수가 없다”고 토로한다.
어린이집 종일반 대부분 오후 6~7시엔 문 닫아
워킹맘을 위해 국내에서 논의되는 모성보호 장치는 육아휴직이나 수유실 설치 등 기본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출산 전후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을 배려하는 것일 뿐, 이후 7~8년 동안 이어지는 험난한 육아 과정은 오로지 부모가 해결해야 한다.
서울 노원구에서 12년째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송아무개(56) 원장은 “직장 여성들이 버티지 못하고 그만 두는 시기를 보면, 출산 전후보다 아이가 4~5살로 한창 자라는 때가 훨씬 많다”고 말한다. 영아기 때는 외부 도움으로 어떤 식으로든 버틸 수 있지만, 아이가 자라서 부모의 손길이 더 필요한 시기가 되면 워킹맘들의 고민이 극에 달한다는 설명이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도 워킹맘들의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후 1~2시에 학교가 끝나 학원을 3~4개씩 보내도 결국 오후 6~7시면 아이들은 갈 곳이 없고, 워킹맘의 고단한 ‘퇴근 투쟁’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한국여성개발원 서문희 박사도 “대부분의 워킹맘들이 절실한 것은 오후 7~8시의 한 시간 안팎”이라며 “하지만 이 짧은 시간을 위해 따로 보육교사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박차옥경 복지부장은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야간보육 시설을 꾸준히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들도 이를테면 공동육아처럼 주변 부모들과 공동체를 형성해 육아부담을 나누는 방법을 찾아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기업이나 직장 단위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이지선(31·성남시 분당구)씨는 자신의 회사를 포함해 몇몇 회사가 공동으로 출자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낸다. 6개월이 지난 영아 때부터 아이를 맡길 수 있고, 밤 10시까지 아이들을 돌봐준다. 이씨는 “10시까지 아이를 맡기는 부모는 거의 없고 대부분 8시 전후에 데려간다”면서 “결국 1시간 정도 더 여유를 주는 셈인데, 부모가 느끼는 혜택의 크기는 1시간 이상”이라고 말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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