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5.01 17:53
수정 : 2007.05.0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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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어진의 여성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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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어진의 여성살이 /
2박 3일 고향 방문단. 일행은 친정 엄마와 내 남동생 커플, 그리고 중간시험 마친 내 딸과 나, 이렇게 다섯이다. 배 박물관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바로 나주. 여기저기 연보랏빛 자운영 꽃밭이 보인다. 예전에도 땅 힘을 북돋우기 위해 벼농사 끝난 가을 논에 씨 뿌려 봄꽃피고 나면 갈아엎던 자운영이다. 애잔한 자태로 사랑받다가 곧장 퇴비로 쓰이던 자운영이 이젠 친환경 농업정책의 최일선에서 활약하는 모양. 그 꽃밭 너머 바람에 서걱거리는 보리밭과 유채꽃을 똑 닮은 노란 돌갓꽃의 파티가 시작된다. 평생 내 눈엔 4월 보리밭만한 절경이 없다. 그중에서도 영산강을 건너온 봄바람 속에 서서 바라보는 보리밭 풍경이 최고다.
해 질 녘, 영산포 다리 건너 선창가에 홍어 축제 구경을 간다. 작은 식당에 들어가 동동주에 홍어회와 무침을 주문하고 보니 종업원은 필리핀에서 온 듯한 이주여성들. 홍어 축제 아르바이트로 뛰는 모양인지, 홍어애탕을 주문해도 의사소통이 힘들다. 미안해하며 서비스로 파전을 내온 필리핀 새댁이 귀여워 친정 엄마가 자꾸 말을 붙이신다. 그러고 보니 홍어 축제의 주연인 홍어는 거의 칠레 출신. 국제화된 홍어 잔치에 신이 난 엄마는 동동주 두 잔을 겁 없이 들이켜 우리를 놀라게 하신다.
다음날, 나와 남동생의 어린 시절 천국이었던 외갓집에 들른다. 외갓집은 이제 빈집이다. 큰외삼촌과 외숙모께서 시내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긴 때문이다. 그래도 뒤안 감나무엔 새순이 돋고 동백꽃은 붉다. 점심은 화순역 부근 보리밥집. 나물을 넣고 고추장에 쓱쓱 비벼 모두들 보리밥 한 양푼을 거뜬히 비운다. 놀라운 먹성. “식구가 반찬이다”는 엄마표 명언, 진리다. 지리산 화엄사와 연기암을 팔순의 엄마가 느릿느릿, 사뿐사뿐 오르시며 화사하게 웃으신다. 지금 이 순간 이만큼 건강하신 엄마가 계시다는 게 너무 좋아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버스 터미널 역 기사식당, 엄마는 이번에도 막 버무린 부추 무침에 순댓국밥을 맛있게 드신다. 평생 우리에게 따뜻한 밥을 대접했으면서도 내가 사드린 순댓국밥 한 그릇에 고맙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시는 엄마. 왜 당신 자신이 수십년 베푼 서비스의 총량은 계산에 넣지 않으시는 걸까? 고품격 럭셔리 여행은 아니지만 엄마 모시고 고향 골목길 밟는 오늘이 과분하다. 오, 해피 데이!
칼럼니스트/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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