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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21 19:13 수정 : 2007.05.21 19:13

박어진의 여성살이

박어진의 여성살이 /

아홉 달 뒤면 형부가 정년퇴직하신다. 일대 사건이다. 원전 관리 엔지니어로 지방에서 오래 근무했던 터라 언니와 조카들이 사는 서울로 돌아오게 되는 내년 초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엇갈린다. 두 집 살림살이도 합쳐야 한다. 언니는 아파트가 좁아질 게 살짝 걱정인 모양. 주말 남편에 적응되어 주중 내내 자기 시간을 누려왔으니 하루 세 끼를 집에서 먹는 ‘삼식이 남편’의 등장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퇴직 이후 커리어를 골똘히 구상해 온 형부. 일주일에 한 번 대학 강의는 당분간 계속한다는 계획이다. 방사선 관리 분야에서 30년, 자신만의 콘텐츠를 담은 책도 쓰신 분이니, 관련된 일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죄의식을 느끼는 세대에게 퇴직이란 아무리 준비해도 적응이 쉽지 않은 전환기. 통증이 없을 리 없다.

한편으로 퇴직은 알량한 몇 가지 특권 패키지로 가장을 한껏 치켜세우며 평생 가족 부양의 짐을 지워왔던 가부장제의 음모로부터 풀려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더 이상 생계부양자의 위치가 아니라 평등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귀환. 강등 비슷한 느낌이랄까? 그가 가족 내 달라진 자신의 위상에 적응이 쉽지 않을 건 너무 당연하다. 가족들도 ‘가정적인’ 아버지와 남편에게 긴장하긴 마찬가지. 퇴직 후 가정 복귀의 스트레스란 퇴직 당사자만이 겪는 게 아니니 말이다.

처제로서 형부의 퇴직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형부가 평생 보여준 가정 친화적 면모 때문이다. 형부가 다녀가시는 주말, 언니네 부엌 가스레인지는 반짝반짝 빛난다. 일요일 언니의 늦잠을 깨울세라 덩치 큰 형부가 살금살금 움직이며 거실을 치우고 빨래를 개키는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논술 과외교사인 언니를 위해 설거지 감 앞에서 먼저 고무장갑을 끼는 형부. 군림하는 대신 살림을 나눠맡는 내공만으로도 손아래 동서들을 제압한 바 있다.

언니에게 청혼하러 왔던 곱슬머리 꽃미남은 이제 쌍둥이 남매의 자랑스런 아빠. 단 한번도 투덜대지 않고 가장으로서의 책무에 임한 성실남이기도 하다.

처제 셋은 깜짝 파티를 열 계획이다. 그리고 잔을 가득 부어드릴 생각이다. 우리는 안다. 그가 남편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때로 견디기 힘든 조직 내 굴욕을 말없이 참아냈다는 걸. 그리하여 마침내 임무를 완수한 형부, 바로 모든 평범한 대한민국 남성들의 위대한 얼굴이 아닌가? 그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합당한 예우로 사랑과 존경을 표하는 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형부의 퇴직을 처제들은 기립박수로 맞을 생각이다.

칼럼니스트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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