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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11 19:55 수정 : 2007.06.11 20:00

박어진의 여성살이

박어진의 여성살이 /

가까운 백화점 문화센터 프로그램을 검색하다 낯익은 이름을 만났다. 대학 시절 은사이셨던 분. 오래 연락드리지 못해 송구한 김에 전화 드려 뵙기를 청한다. 3개월 코스인 ‘영문학 산책’이 막 개강하려던 참이라니. 점심시간 백화점 식당가의 북새통 속에 마주앉는다. 2년 반 전 정년퇴임. 작년 겨울 심장 수술을 받으셨다는 데 건강하시다. 오전엔 옛 대학에서 ‘영문학 개론’을 강의하시고 오신 길이라 한다.

문화센터 운영자와의 인연으로 강연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게 5년 전의 일. 영어 문학권의 소문난 작품들을 함께 읽으며 줄거리 뿐만 아니라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맥락을 짚어보는 게 목적이다. 열다섯 명 정도 되는 수강생들의 주류는 강좌가 개설될 당시의 멤버들. 놀랍다. 시, 소설과 연극까지 장르를 망라하며 토마스 하디부터 D.H. 로렌스를 거쳐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까지 영국 문학의 광맥을 뒤져왔다. 미국 문학도 웬만큼 총 정리가 되었다 한다.

6년 넘게 불후의 명작들을 섭렵하다 보니 급기야 불문학의 영역을 침범, 까뮈를 함께 독파하셨다는 고백. 이번 달엔 에밀리 디킨슨에 이어 중남미 문학권 대표 선수인 보르헤스까지 다룬다는 야심찬 커리큘럼을 슬쩍 공개하신다. 이쯤 되면 ‘지구문학 산책’으로 간판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수강생들의 신분이 궁금해진다. 50대와 60대 여성들. 대개 미국 생활 경험이 있다. 영문학 전공자는 극소수. 그 외엔 화가, 작곡가 서넛을 포함 모두 비문학권 중년 여성이란다. 멀리 분당에서 온 이도 있다. ‘확대복사’를 해야 간신히 읽을 지경인 깨알 같은 영문학 원서들. 그런데도 그녀들은 성실한 리딩으로 어느덧 아마추어 영문학 동호회 수준을 넘어섰다는 선생님의 평가다.

무엇이 그들을 영문학의 세계로 이끌었을까? 궁금하다. 사실 문학은 성숙한 인간들의 분야다. 영문과 학생 시절 나도 셰익스피어의 글줄이나 외우고 다녔다. 그렇지만 생의 좌절을 경험해 보지 못한 풋내기가 문학의 깊이에 대해 도대체 뭘 알았겠는가?

“대한민국 사람들은 왜 밑도 끝도 없이 배우는 걸까요?” 예나 지금이나 버릇없는 학생의 질문. “오늘 배우면 어제 몰랐던 걸 깨치는 거지. 이보다 더 재밌는 게 어딨니?” 선생님의 태연한 대답. 과연, 새로움에 대한 긴장과 호기심이 없어지면 그 누구도 더 이상 젊지 않다. “나이가 80이든 90이든 배우는 재미는 아무도 못 뺏어가거든.” 선생님이 눈을 찡긋하신다. 영문학 교실의 그들이 중년에 이르러 스스로 사교육을 위해 나선 이유, 충분하다.

칼럼니스트/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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