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6.25 19:00
수정 : 2007.06.2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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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어진의 여성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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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어진의 여성살이 /
요즘 ‘다이내믹 코리아’를 선도하는 건 텔레비전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이 아닐까 싶다. 명품 유전자를 지닌 남자를 원 나잇 스탠드로 기용해 임신한 뒤 남자를 버리고 ‘미스 맘’이 되겠다는 설정이 등장했다. 통쾌하다. 유구한 남녀상열지사를 통틀어 약자였던 여성들이 눈물짓고 매달리는 대신 남자를 자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판도,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가져온 쾌거다. 판타지라고는 해도 일정 부분 대한민국 결혼 시장의 현실을 반영 또는 예측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드라마 속 우리의 여주인공은 좌충우돌하다 결혼으로 귀결될 것 같은 불길한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말이다.
근데 스물 넷 우리 딸이 수상하다. 여주인공의 임신 작전에 영감을 받은 듯. 결혼엔 관심이 적지만 아기는 낳고 싶다고 공공연히 떠벌리던 터다. 윽, 이러다 사위 없이 손주만 품에 안게 되는 사태를 각오해야 하나? 나보다 남편이 적응을 못 할 것 같다. 그런데도 딸은 결혼을 통하지 않고 아기 얻는 방법을 연구하겠다나. 입양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딸의 주변에 또래 남자들은 넘쳐 난다. 남친은 사귄 적이 없다. 남자를 그냥 친구나 선후배로만 보는 걸까? 아님 남자들에게 친구나 선후배로만 받아들여지는 건지도 모른다.
비혼은 참으로 오랫동안 불온한 행태였다. 이 땅에서 민주주의보다 힘센 유일한 이데올로기는 결혼주의가 아닌가?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결혼을 ‘정상’으로 규정한 체제 속 비혼은 반체제 비주류일 수밖에. 한 때 독신을 표방했으나 비혼이 일종의 사회적 장애임을 간파한 뒤 위장 전향, ‘결혼한 비혼주의자’로 살아온 건 나만의 사례가 아닐 것이다. 요즘도 사회는 비혼에 대한 박해를 광범위하게 자행하며 세제상의 차별까지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거기에다 결혼 적령기라는 정체불명의 괴물은 여전히 출몰하고 있으니.
비혼모를 꿈꾸는 여주인공의 이야기는 견고한 결혼주의에 대한 경쾌한 테러라서 즐겁다. 젊은 그녀들이 사랑과 웨딩의 몽롱한 포장으로 얼버무려진 결혼의 실상을 직시하며 결혼이라는 계약의 내용을 꼼꼼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신호, 반갑기까지 하다. 결혼은 당사자인 갑과 을의 대등한 계약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들의 결혼 현실을 가까이서 목격하며 자란 딸들이 그런 계약 속으로 선뜻 진입할 리 만무. 어쩜 단기 실험 결혼이 결혼 예비 단계로 널리 보급될 수도 있겠다. 근데 딸이 불시에 비혼모 선언을 한다면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으려나?
박어진 칼럼니스트/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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