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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23 18:47 수정 : 2007.07.23 18:47

박어진/칼럼니스트

2050 여성살이 /

여행은 즐겁다. 밥하기 싫은 여자들에게 여행은 더 즐겁다. 밥 짓고 국 끓여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게 직업이니 비록 며칠이라도 매끼 남이 차려주는 밥을 먹는다는 건 신분 급상승에 대접받는 느낌까지. 한 마디로 황홀하다.

친구 셋과 떠난 8일간의 러시아 패키지 여행. 우린 모든 것을 맛있게 먹었다. 비행기 기내식부터 바이칼 호수의 생선 ‘오물’ 훈제 구이까지. 조금 시큼하게 발효된 검은 호밀빵과도 친해졌다. 바람에 실려오는 닭고기 꼬치구이의 지글대는 연기와 냄새의 유혹에도 쉽게 무너진 건 물론. 급기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호텔 방에선 동네 마트에서 사 온 햄과 꽈배기 치즈에 보드카와 맥주를 곁들여 백야 파티를 벌였다. 여행 중 우리가 먹어 치운 모든 음식은 러시아 체험의 진한 일부분. 유럽풍 우아한 건축물과 양파머리 성당들이 즐비한 도시나 시베리아 자작나무숲의 충격적인 아름다움 못지않은 즐거움이었다.

현지 음식에 열광하는 우리들과 달리 여행팀에 합류한 다섯 명의 40대 남성들은 현지 음식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굳이 현지음식에 적응할 의욕이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듯 튜브 고추장을 끼니마다 배급하는 친절에다 컵라면까지 챙겨들고 온 세심함이라니. 한국 음식에 대한 충성을 고수하는 입맛의 소유자들답게 현지 음식은 “느글느글”하고 “두 끼 계속 먹으면 토할 것 같다”나. 그들 스스로 한국 남성들이 해외여행 중 음식 적응이 힘들다는 통계까지 들먹이며 고충을 토로한다. 이게 만일 지구의 모든 남성이 아니라 한국 남성들에게만 국한된 사실이라면 흥미로운 분석대상이 아닌가? 한국 남성의 생태 보고서에 빠져서는 안 될 항목 같다. 한편으론 한국음식의 강력한 중독성을 의심해 봐야할 사안이기도 하다.

대개의 내 친구들처럼 나도 한국을 떠날 때 한국 음식을 잊는다. 어디든 현지 음식을 닥치는 대로 맛본다. 버섯 수프에 번번히 매혹되고 샐러드 소스의 배합 비율에 대한 추리도 해본다. 부엌 실무자로서 러시아 식단에서 우리 토속 메뉴에 응용할 아이디어를 찾으려는 직업의식이 은연 중 발동하는 걸까? 샐러드풍의 겉절이를 만들어볼 영감을 얻기도 했다.

러시아를 떠나던 날, 마침내 우린 어느 ‘러마트’에서 ‘하몽’과 치즈를 샀다. 가히 ‘야매’ 보따리 행상의 면모랄까. 그날 밤 우리 집 저녁상에 앉은 아이들이 환호했다. 그 ‘완소’ 패키지에는 멸치 젓갈 스타일의 생선 통조림까지 들어있었다. 이건 러시아 국내선 기내식에서 처음 맛본 건데 시큼한 호밀빵 사이에 끼워 샌드위치로 먹는다나. 낯선 음식에 대한 불타는 모험심이 있는 여행, 신나지 않은가?

박어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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