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0.18 20:06
수정 : 2007.10.1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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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어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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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 여성살이 /
인생 이모작이나 다모작 같은 건 먼 나라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그러던 내가 그 대열에 합류한 지 벌써 3주째다. 바늘귀도 가물가물해 돋보기 신세를 져야 하는 쉰셋의 나이에 신입사원이 되다니, 가당찮은 처신이 아닐까? 무슨 대단한 영화를 보겠다고 아침마다 강 건너 북진을 한단 말인지, 원. 다들 신기해한다.
일터는 영문 문화콘텐츠 전문출판사인 중소기업이다. 20대와 30대 디자이너들과 출판기획자들이 주축이다. 우선 업계의 전문용어부터 익혀야 한다. 2단 접지, 3단 접지 같은 간단 용어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젊은 동료들, 아니 선배들의 이름과 업무 영역 파악도 급선무다. 일의 맥락을 모르니 스태프 회의에서 오가는 발언 내용의 해독률은 50퍼센트에 못미친다. 내 깐엔 아이디어랍시고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한다.
당장 발등의 불은 외국인을 위한 50쪽짜리 한국생활 안내 소책자의 콘텐츠 구성안이다. 의료분야 소책자라서 한국에서 아기 낳기부터 ‘119’ 부르는 법이나 애완동물 병원 안내까지 접근 가능한 의료서비스 체계에 대한 정보를 총망라해야 한다. 핵심은 외국인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 정보를 무작정 늘어놓기보다 눈에 쏙쏙 들어오게끔 알기 쉽고 재밌게 꾸며야 한다. 업무상 공기업의 출판물 입찰에 응해야 하고 개별 클라이언트들과도 만나는 일이 잦다. ‘을’의 위치에서, 그것도 직원 수 19명인 회사 직원 신분의 위치에서 ‘갑’을 보게 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때로 예측하기 힘든 상대에게 적응해 가며 일을 진행하는 업무능력을 갖춰야 한다니. 강도 높은 학습과정이다.
정작 스트레스 발생 요인은 따로 있다. 젊은 동료들에 비해 턱없이 달리는 내 컴퓨터 능력 말이다. 영어도 문제다. 급기야 아침마다 지하철 공짜 신문에 실린 영어 단어와 문장을 우물우물 외우는 버릇이 생겼다.
고 3 아들의 수능을 코앞에 두고 일어난 사건인 내 취업에 대한 주위 반응은 웬일인지 축하 일색이다. 한 선배는 비타민C 한 통을 안겨준다. 이건 아무래도 위문품이다. 살아 있는 동안 여러 번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것, 짜릿하다.
길이 어디로 뻗어 있는지를 알려면 끝까지 걸어보는 수밖에. 그리고 이왕 걸어야 한다면 웃으면서 걸어야지. 그 뱃심이 연로한 신입사원의 장사밑천이다. 그러고 보니 세상은 모르는 것투성이라서 신나는 것 아닐까? 첫 월급을 타면 친정엄마와 시엄마께 꽃무늬 블라우스를 사드려야지.
박어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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