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1.29 20:22
수정 : 2007.11.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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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어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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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 여성살이/
늦가을 밤 안국동 밥집, 승정씨와 나는 보글보글 청국장 뚝배기와 오징어 파전 한 접시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그녀가 나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아니, 이런 광영이? “올해의 인물” 같은 건 바다 건너 <뉴욕타임스>가 전 지구적 지명도의 개인을, 그것도 시의적절하게 뽑는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다. 선정 배경은 ‘올해의 가장 의미있는 만남’이기 때문이라는 승정씨의 설명. 가만 있을 수 없지. 나 역시 그녀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한 살 아래인 승정씨를 처음 만난 건 지난 8월 뙤약볕 속 강화도 들길에서였다. 떠들며 걷는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강화도 철책선 옆길을 말없이 혼자 걷던 그녀. 우린 단박에 통했다. 무려 50년을 각자 살아온 두 영혼의 정면 충돌 양상이라고나 할까. 살아온 이야기와 서로의 꿈을 말하고 듣느라 우린 한동안 바빴다. 런던에서 파트타임 소셜 워커로 일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 교육학 박사과정 파트타임 학생 신분인 승정씨. 이번엔 프리랜서 집필가로 구상 중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책을 쓰려고 다시 라말라와 예루살렘으로 향할 차비를 한다. 그녀에게서 나는 팔레스타인의 ‘올리브나무를 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반대하는 이스라엘 여성들’ 모임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정책을 미워하던 나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 정책을 반대하며 활동중인 그곳 평화운동가들에 대해 안다는 건 얼마나 신선한지. 현지 체험에 바탕한 승정씨의 견해는 나의 편협한 관점을 바꾸었다.
친구를 갖는 건 그의 고향과 인적 네트워크와 관심사를 나누는 일. 생각의 차이는 또 서로를 성숙하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하늘의 선과 정의에 대한 승정씨의 믿음과 겸손은 비종교적인 내겐 얼마나 아름답고 경건한지. 그의 섬세한 마음 씀씀이는 덜렁이인 내게 무심코 혀에 독을 묻히고 말을 내뱉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 삶의 제일 중요한 교과서는 친구들이다. 그리고 50이 넘어도 새 친구를 사귀는 기쁨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먼길 떠나는 승정씨가 나를 지하철역까지 바래다 주었다. 우린 서로에게 가장 환하게 웃어주고, 내일 아침 다시 만날 사람들처럼 헤어졌다. 언제 그녀가 돌아올 지 모른다. 다시 만날 때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올해의 인물’상 수상자는 기쁨과 함께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박어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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