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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30 10:52 수정 : 2005.04.30 10:52

임산부를 배려하는 직장문화가 필요하다. 2003년 4월1일 서울 신촌에서 서울여성노동자회 회원들이 모성보호 관련법의 실질적 적용을 촉구하며 ‘임산부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제공



[생활의발견]‘출산을 앞두고’ 4
친구들, “애 키우며 살림하겠다”는 나에게

입덧과 유산의 위험 등으로 마음을 졸였던 임신 초기가 큰 어려운 없이 지나갔다. 슬슬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전에 입던 옷으로는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배를 감당할 수 없어 임부복을 사 입었다. 5개월째 들어서니, 태동(뱃속의 아이가 움직이는 일)도 느껴진다. 이제야 정말로 ‘엄마’가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매월 2kg 가량 꾸준히 늘어가는 몸무게와 불러오는 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조심해야 할 시기는 지났다고 하지만, 과격한 운동이나 무리한 업무는 여전히 힘에 부쳤다. 주변에서 임신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만나는 사람(일 때문에)마다 건강을 염려했다. 쑥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아~ 내가 엄마가 된다니!’

“힘들면 회사 그만두지? 굳이 맞벌이를 하려고 해? 기왕 임신했으니, 살림과 육아를 전담하는 것은 어때?” 많은 이들이 묻기 시작했고, 내 답변을 궁금해 했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때 그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살림하면 되지, 뭘 고민해?”였다.


“왜 임신한 여성이 ‘기를 쓰고’ 회사에 다니느냐고?”

“진짜 한심한 기자네요. ㅡㅡ;; 전 26살에 한 아이의 엄마이고, 우리 신랑과 전 아이로 인해 더 열심히 아끼며 살고 있는데 맞벌이로도 힘들다니 도대체 한달에 쓰는 돈이 얼마길래. 그리 넉넉하진 않을지 모르지만 요즘 같이 취업도 힘든 마당에 배부른 소리 하는 것 같네요.”(<네이버>에 댓글을 남긴 아이디 ‘ojk1357’)

“맞벌이부부인데도 저렇게 생활이 힘들다는 건 푸념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전 두 아이 아빠이고 능력도 없어 200만원도 못 벌지만 집사람과 상의해 저 혼자 벌고 아내는 아기 키웁니다. 두 아이와 맞벌이로 생기는 경제적 여유 중에 아이를 택했지만 우리 부부는 만족하는데….” (<네이버>에 댓글을 남긴 아이디 ‘rodman59’)

‘생활의 발견’ 글이 연재된 이후 내게 쏟아진 비난도 다르지 않았다. ‘욕심이 많다’, ‘굳이 맞벌이를 고집하는 이유가 뭐냐?’, ‘자신의 성공(?)에 너무 집착하는 것 아니냐?’ 등 비난에서부터 시작해, 완곡하게 ‘전업주부’의 즐거움을 누려보라는 제안도 나왔다.

난들 모르겠는가. 여건이 된다면, 사랑하는 가족과 아이를 위해 직장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남편에게 종종 “나 회사 다니기 싫어. 너무 힘들어. 경제적 형편만 된다면 쉬고 싶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남편 역시 “미안해”라며 맞벌이를 권했다.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던 시절만 해도, 가족 중 가장 한 사람이 돈을 벌면, 아끼고 쪼개 대여섯 명 되는 자식들 다 키우고 집까지 장만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그때는 가능했던 것들이 지금은 왜 가능하지 않은 것인가.

“이래저래 혼자 벌어먹고 살기는 힘든 세상이에요.”

▲ 임산부를 배려하는 직장문화가 필요하다. 직장에 다니며 10개월째 젖을 먹이고 있는 한 엄마가 회사에 수유실이 따로 없어 건물 청소원용 탈의실에서 아기에게 줄 모유를 짜고 있다. 장철규 기자
결혼 5년차 서울에 사는 박아무개(33·남·회사원)씨의 월 평균수입은 200만원. 9천만원짜리 전셋집을 얻을 때 3천만원의 빚을 졌다. 현재 갓 돌을 넘긴 아이 한 명을 키우고 있고, 아내는 임신과 동시에 전업주부의 길을 택했다. 월 생활비로 대출이자와 제세공과금 40만원, 용돈 및 생활비 80만원, 육아비 30만원 등을 지출하고 있으며, 돈을 아껴 매년 500만원씩의 빚을 상환하고 있다. ‘허리띠를 졸라매’ 가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한국 표준의 가정인 셈이다. 박씨는 푸념한다.

“그럴싸한 아파트 전세라도 얻으려고 결혼 4년까지 맞벌이를 했어요. 그때처럼 벌었으면, 1년에 1500만원씩 저축할 수 있었겠지만, 이 상태로라면 앞으로 꼬박 6년간 3천만원 갚아야 하고. 집 사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아이를 맡길 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고, 아이를 직접 키우고 싶다는 뜻에 따라 전업주부의 길을 택한 아내도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요. 재취업이 쉽지 않고, (사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의 생활이 너무 힘드니까요. 이래저래 혼자 벌어먹고 살기는 힘든 세상임을 느끼고 있죠. 왜 다들 맞벌이를 고집하는지 알 것 같아요.”

“힘들어도 회사 다녀. 나중에 후회해. 몇 년 고생하는 게 나아”

박씨의 사례를 들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맞벌이 아니면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한탄을 주변에서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저축을 하며 집 한 채 장만하려면 맞벌이를 해야 한다는 푸념 말이다. 나 역시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빚을 안고 전셋집을 마련한 나로서는 전세자금 대출원금과 이자 상환도 벅찬 형편이다.

언론에서는 대기업의 연봉 수준과 억대 연봉자가 몇 명이라지만, 그만한 고소득을 보장받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많은 이들이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가장들은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직장을 잃고 있다. 고소득자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의 보금자리인 집 한채 마련하기가 버겁다. 1억원짜리 집을 한 채 마련한다고 할 때 월 100만원씩 꼬박 저축해도 8년 넘게 모아야 가능한 세상이다.

실제 지난해 초 부동산뱅크 리서치센터는 도시근로자가 서울에서 월급을 받아쓰고 남은 돈을 저축할 경우 18년 만에 25평짜리 아파트(2억2214만원)를, 23년3개월 만에 32평형 아파트(3억1236만원)를 장만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기준도 도시근로자의 월 평균 가계소득과 지출을 301만9천원, 231만2천원으로 각각 산정해 월 평균 가계 흑자액을 70만7천원으로 한 것이어서 실제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70만원의 가계 흑자를 내려면, 혼자 벌어서는 힘들다.

“나도 집에서 애 키우며, 살고 싶다~”

그래, “까짓것 몇 년 쪼들려 살지” 하고,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고려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취업의 문제가 또 걸린다. 한국사회에서 특히 요즘처럼 실업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상황에서 주부 재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주방보조나 서빙, 청소 등 적성과 소질을 살리기 힘든 직업들이다. 그러니 사표를 던지는 건 망설일 수밖에 없다. 결혼 또는 임신과 동시에 직장을 포기한 친구들 가운데 재취업에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친구들은 만날 때마다 “힘들어도 회사 그만두지 마. 경제적 여유는 둘째 치고, 너를 위해서라도 말이야!”라고 충고했다. 고교 친구 정아무개와 김아무개는 아이를 갖기 전까지 무역회사 직원, 대학교 교직원으로 일했다. “지금은 취직하고 싶어도 뽑아주는 곳이 없다”고 푸념하는 이들은 무엇보다 ‘임신 뒤 회사를 그만둔 일을 가장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여기저기 이력서도 내보고, 공인중개사 자격증도 따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나를 포함한 임신부들이 육아나 보육문제를 고민하면서도, 맞벌이를 고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업주부들의 고민은 또 있다. ‘자신의 인생이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다. 많은 여성들이 우울증에 걸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친구 정아무개는 “그동안 남성 못지않게 배웠고, 능력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젊고, 지금도 충분히 일할 수 있고 능력을 키울 가능성도 많은데 육아에만 내 인생이 매몰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다른 친구 김아무개는 “30~50대 주부들이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는 인생을 자식들을 위해 살았는데, 결국 남는 게 아무 것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을 위해 이뤄놓은 것도 하나도 없다는 절망감 때문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참내 한두 살 차이 6남매를 낳으시고 고등학교·대학교까지 보낸 우리 조부모님은 국가에 뭐 혜택 받은 것 하나 없다. 텃밭 가꾸시고, 온갖 일 다 하며 자식 모두 훌륭하게 키운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너무 존경스럽다”는 누리꾼 ‘huekpoong’의 말이 가슴에 더욱 와 닿는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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