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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1 19:53 수정 : 2005.07.22 00:41

다수의견과 별개의견

‘분묘수호·제사 남성 전유물’ 관습법 설득력 잃어


여성의 종중원 지위를 인정한 21일 대법원 판결은 남녀평등 의식이 제도적, 문화적으로 확립돼 가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성년 여성도 당연히 종중의 회원으로 편입된다”는 김영란 대법관 등 7명의 다수의견에는 이제 더 이상 “분묘수호와 제사를 모시기 위해 성년 남자들만이 종원이 돼야 한다”는 관습법이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는 현실인식이 반영돼 있다.

대법원은 성인 여성도 종중원이 될 수 있는 이유로 △1970년대 이래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산업·도시화와 함께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가 커지면서 남녀평등 의식이 더욱 넓게 확산되고 있으며 △출산율 감소와 남아선호 내지 가계 계승 관념의 쇠퇴에 따라 딸만을 자녀로 둔 가족의 비율이 늘게 됐고 △부모에 대한 부양에 있어서도 아들과 딸의 역할에 차이가 없게 됐으며 △제사방식에도 변화가 생겨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더 이상 특이한 일로 인식되지 않게 된 것을 들었다. 또 △화장이 확산됨에 따라 조상의 분묘수호를 주된 목적의 하나로 하는 종중의 존립기반이 동요될 수 있는 요인이 생겼으며 △족보에도 딸을 아들과 함께 기재하는 것이 일반화하고, 성년 여성에게도 종원의 지위를 부여하는 종중이 상당수 등장했다는 점도 고려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용인 이씨 사맹공파 여성들이 종중 땅 매각대금을 재분배 받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종중 참여에 있어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인정받기는 했지만, 판결 이전에 남성 종중원들만의 결의로 이뤄진 법률행위(재산분배)의 효력마저 부정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앞으로는 여성들을 제외한 남성들만의 결의만으로 이뤄진 모든 종중의 법률행위는 법적 정당성을 잃게 된다.

21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용인 이씨 사맹공파와 청송 심씨 혜령공파 여성들이 “여성도 종중회원으로 인정해달라”며 낸 소송에 대한 선고가 진행되고 있다.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한편 최종영 대법원장 등 대법관 6명은 이번 사건을 원고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하면서도 “성인 여성이 가입 의사를 표시해야만 종중원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별개 의견을 내놓았다.


이들은 판결문에서 “사적 자치단체인 종중의 구성에 있어서 남녀평등의 원칙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헌법 21조 1항의 결사의 자유와의 관계가 먼저 검토돼야한다”며 “제사에 대해 미풍양속이라는 견해에서부터 미신으로 보아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양심의 자유(헌법 19조)와 종교의 자유(헌법 20조)와의 관계도 고려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어 “사적 자치단체 구성원의 자격을 인정할 때 구성원으로 포괄되는 사람의 신념이나 의사에 관계없이 인위적·강제적으로 누구든지 구성원으로 편입돼야 한다고 볼 수는 없다”며 “이러한 기본인식에 비춰 ‘공동 선조와 성과 본을 같이 하는 후손은 성별의 구별 없이 성년이 되면 당연히 그 구성원이 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결론에 대해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소송뒤 회유와 협박…말할 수 없는 수모”

소송여성들 복잡한 심경 “여성 지위향상 이제 시작일뿐”

여성도 종중의 회원으로 인정해달라며 소송을 낸 심신자, 심경숙, 심정숙, 이원재, 이순자(왼쪽부터)씨가 21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재판부의 선고를 듣고 있다.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소송을 시작해 오늘 판결이 있기까지 집안 남성들의 회유와 협박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6년에 걸친 재판 끝에 21일 마침내 ‘여성의 종중회원 인정’ 판결을 얻어낸 여성들은 자신들의 손을 들어준 대법원의 이날 판결을 환영하면서도, 재판 과정에서 겪은 온갖 고초들을 쏟아내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용인 이씨 집안의 이원재(57)씨는 “처음에는 가족 안에서 대화로 해결하려 했지만, 남성들 쪽에서 먼저 ‘해볼테면 해봐라’는 식으로 나왔다”며 “이 때문에 결국 가까운 가족들이 의절까지 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맏언니인 이원숙(72)씨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부모님이나 조상한테서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차별받는 것이 억울해 소송을 냈던 것”이라며 “금전적인 문제보다도 여자라서 받는 수모와 억울함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용기를 냈지만, 사회가 이를 제대로 이해해주지 않아 힘든 싸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들 자매들은 “처음에는 2천만원씩을 받고 고마워했지만 얼마 뒤 집안의 며느리들에게는 3천만원씩이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참을 수가 없었다”고 소송 배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청송 심씨 집안의 심경숙(65)씨도 “그동안 집안 사람들한테서 받은 냉대로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며 “심지어 ‘칼로 찔러 죽인다’거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어야 했다”고 그동안의 고충을 털어놨다.

심씨와 이씨 자매들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더욱 더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심정숙(68)씨는 “돈 문제를 떠나 이번 판결은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여성들에게 희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원재씨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 앞으로 할 일이 많다”면서 “우리 출가한 여성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열면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봉사하는 활동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태규 기자 강나림 인턴기자

여성계 “‘출가외인’ 없애는 중요한 계기”
유림 “종중·가정 의미 퇴색…혼란 가중”

엇갈리는 반응

여성도 종중원으로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여성계는 대체로 “출가한 여성을 집안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출가외인’의 개념을 사실상 없애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유림단체 쪽에서는 “가정의 의미가 퇴색해 사회에 커다란 혼란이 생긴다”고 반발했다.

여성계 “사적 영역에서도 차별 철폐 계기”=한국여성단체연합은 이날 논평을 내 “부계혈통만을 인정해온 호주제가 지난 3월 폐지된 데 이어, 사인간의 규약에서도 여성을 배제한 조항이 성차별적인 것임을 다시 한 번 드러낸 이번 판결을 대단히 환영한다”고 밝혔다. 남윤인순 상임대표는 “후손을 ‘성년 남성’으로 한정시킨 기존 법원의 판례를 뒤엎음으로써 관습적으로 이어지던 남녀차별적인 집안 문화를 바꾸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아울러 재산권 문제에서도 양성평등이 중요하게 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한국여성민우회 유경희 상임대표는 “이제까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종중의 재산권과 분묘 제례 등의 정보와 권리에서 제외돼 있었던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자격과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은 “지난 65년 남성 성인만을 종중원으로 인정한다는 40년 전의 판례가 지금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던 것에 대해 뒤늦게라도 대법원이 바로잡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며 “앞으로 모든 문중에서 남녀를 차별하는 관행을 없애고 종중의 규약을 고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법학자 출신인 이은영 열린우리당 의원은 이번 판결에 대해 “헌법의 남녀평등정신을 구현한 바람직한 판결”이라고 전제한 뒤 “앞으로 종중의 남아선호사상 자체가 사라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앞으로 본인의 의지로 여성도 공동 선조의 분묘 수호와 제사에 포함될 수 있게 됐다”고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유림은 반발=유림단체 쪽은 “이번 판결로 종중이나 종친회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승관 전 성균관 전례연구위원장은 “여성의 종중원 지위를 인정하면 ‘가정’의 의미가 퇴색되고 사회에 커다란 혼란이 생긴다”며 “예를 들어, 시집 간 여성이 명절 때 시댁이 아니라 친정 쪽 차례에 참여해야 한다면 가족들이 제각각 여성은 여성대로, 남성은 남성대로 찢어지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용인이씨 사맹공파는 종중원의 숫자가 적어 괜찮을지 몰라도, 규모가 큰 종친회는 여성의 지위까지 인정해주면 조직 범위가 무한정으로 확대되고 재산분배 다툼이 늘어 종친회 운영 자체가 힘들어질 수 있다”며 “성문법보다 관습법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의 민족성향인데, 이번 판결로 혼란이 생길까 염려스럽다”고 덧붙였다.

여성들이 종중원으로서의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이번 사건의 피고인 쪽 변호를 맡은 민경식 변호사는 “지금까지 부계혈통 사회에서 종중을 지키고 종중의 재산을 불려온 것은 성인 남성들”이라며 “여성들이 종중에 돈을 내야하는 ‘관습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재산분배 등 권리만 주장하게 되면 종중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이유진 황예랑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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