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읽는 800년간의 여성 삶-편지 쓰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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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상·여성 지위 살필 수 있어 그 가운데서도 1141년 신비로운 환영을 본 체험을 한 힐데가르트 폰 빙겐(1098~1179) 수녀의 편지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수녀는 자신을 도와줄 신부에게 “당신의 하찮은 하녀인 저에게 선량함을 베풀어 달라”고 애절하게 도움을 청한 반면, 평이 나빴던 교황 아나스타시우스 4세에게는 “성하께서 타락한 자들의 사악함을 말없이 관용하시는 것은 사악함을 내치지 않고 오히려 입맞춤하여 포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일갈하기도 했다. 내키지 않는 상대의 청혼을 받고 상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거절하는 ‘센스’도 현대 여성 못지 않다. 청혼을 거절하는 편지의 공통점은 상대에게 우정을 확신시키되 그 우정이 결코 사랑은 아니라는 점, 그러니까 남성이 자칫 자신의 감정에 대해 헷갈리지 않도록 확실히 해두었다는 데 있다. 대영제국을 건설한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스웨덴 에릭 왕자의 청혼을 거절하며 “전하의 열렬한 성의와 사랑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음에 기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하께 똑같은 종류의 애정으로 기쁨을 돌려드릴 수 없다는 사실에 몹시 가슴이 아픕니다”라고 썼다. 여성 탐험가인 알렉상드라 다비드 넬(1868~1969)은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에게 자신이 아이를 갖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며 양해를 구한다. “내가 태어나 존재하게 된 연유는 내 부모님들이 착각으로 잘못 선택한 화해의 도구였습니다. 만약 내게 자식이 생긴다면 나는 내 어머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자식에게 파괴적인 어머니가 되고 말 거예요.” 이 편지 덕분인지 다비드 넬의 남편은 아내에게 자식 낳기를 강요하지 않고 14년 동안 여행경비를 지원하며 뒤를 돌봤다. 그 외 프랑스대혁명 직전 여성 노동자들이 교육과 일자리를 요구하며 루이 16세에게 보낸 편지, 기혼 여성의 이혼권을 주장하는 작가 캐롤라인 노튼(1808~1877)의 편지 등도 시대를 뛰어넘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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