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26 17:27
수정 : 2005.07.26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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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재단은 2003년부터 ‘짧은 여행 긴 호흡’ 이란 여성공익활동가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2년 동안 여행에 참가한 이는 198개 단체 455명.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없는 여성활동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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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찾자” “마음 비우자”
성적 편견·위험 무릎쓰고…여자 친구끼리 어깨 걸고
엄마-딸 손잡고 함께 간다…돌아올땐 ‘연대의식’ 한아름
길 떠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것은 물론, 위험하다는 편견을 무릅쓰고 여성들끼리 여행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지난 2000년을 기점으로 국내 여행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절반을 넘어섰고, 같은 해 한국관광공사가 집계한 내국인 출국 통계에서도 여성이 전체 출국자의 40.46%를 차지했다.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는 여성 출국자가 남성 출국자보다 매년 4천~8천명 가량 많은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아이들을 공부시키러 떠난 ‘기러기 엄마들’의 영향이 컸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난 엄마들의 숫자 또한 큰 몫을 차지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김혜란(42·가명·경남·농업인)씨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봄까지 넉달 동안 아시아를 여행했다. 지난 겨울, 함께 일하던 사람들 틈에서 맘 고생이 심했던 김씨는 “여행으로 마음을 비우고 싶었다”고 했다. 엄마의 긴 여행길에는 11살과 7살 두 딸이 동행했다. 인도 북부, 네팔, 캄보디아, 타이 등을 다닌 4개월 동안 3명이 쓴 돈은 고작 250만원. 김씨는 “먹거리와 잠자리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여행을 다녀온 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고 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마음이 부쩍 커져서 돌아왔다. 이들 모녀는 올여름에는 국내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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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두세요! 늑대 쫓는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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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일간 앙코르와트 여행을 다녀온 최승은(43·서울·작가)씨도 비슷하다.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인생의 의미와 자신의 장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딸아이와 마음의 경계를 허물려고 여행을 떠났다. 최씨는 “아이가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는 10대 후반이 되면,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가 잘못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자신이 없어진다”고 했다. 이 어려운 시기를 넘는 방법으로 최씨는 여행을 선택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이들이 얻은 건 같은 ‘여자’로서 느끼는 연대감이었다. 여행 뒤엔 <엄마와 딸의 조금은 특별한 여행>(예담출판)이라는 책을 펴내 추억이 담긴 선물까지 공유하기도 했다.
모녀, 친구, 여성동료 등의 여성 여행이 늘면서 다분히 ‘목적의식적’인 여성 여행 프로그램도 꾸준히 생기고 있다. 한국여성재단은 저임금과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리는 여성단체 활동가들을 지원하려고 2003년부터 ‘짧은 여행 긴 호흡’이란 여성공익활동가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2년 동안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는 198개 단체 455명. 이 단체의 신재민 대리는 “경제적 사정과 시간확보가 어려운 여성활동가들의 반응이 높은데다, 만족도가 높아 앞으로도 계속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여성집단 ‘또하나의 문화’가 매년 선보이는 ‘고정희 기행’은 대표적인 여성주의 집단여행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지난 91년 지리산에서 43세의 일기로 짧은 생을 마친 고정희 시인을 기리는 것으로 동인들이 92년부터 연 추모제가 시작이었다. 세대와 지역간의 차이를 뛰어 넘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 이 여행은 올해로 14회째를 맞았다. 지난 6월 세계여성학대회 개최와 맞춰 연 이번 여행에서는 20~50대 국내외 여성 38명이 해남을 찾아 국제적인 여행프로그램으로 이어갈 가능성을 찾기도 했다.
콩고에서 낚시 도구를 팔면서까지 여행경비를 마련했던 메리 킹슬리(1862~1900)나 걸인 행세를 해가며 전세계를 두루 여행한 알렉상드라 다비드 넬(1968~1969) 같은 여성 여행자의 이례적인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이제까지 ‘호연지기’로 대표되는 남성의 여행과 달리 여성의 여행은 소비적이거나 위험한 일로 여겨져왔다.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만고불변의 진리 같은 말이 있음에도, 여성들은 왜 집을 떠나는 걸까? 성적인 편견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고행을 왜 사서 하는 걸까?
‘또하나의 문화’ 최윤정 사무국장은 여성의 여행에 대해 “자신의 삶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지난해부터 여성주의 해외여행 프로그램을 선보여온 언니네트워크의 조지혜 대표는 “직장을 옮기거나 결혼, 출산, 폐경기 등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여성들이 자신을 돌아보면서 여성들끼리 갈 수 있는 안전한 여행을 하려고 대안적인 여행에 눈을 돌리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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