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04 09:26
수정 : 2005.08.0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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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몽정기2’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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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남성이 성기를 노출해선 안되는 또다른 이유
지상파 생방송 출연자가 바지를 내려 성기를 드러내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 놀라움은 찰나적인 인지의 공백상태를 낳는다. 댄서들의 점프는 역동적이다. 하지만 관객과 시청자들은 일시정지 상태에서 댄서들과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 그리고, 급속냉동에서 풀려난 물고기가 꼬리 지느러미부터 서서히 퍼덕이다 온몸을 격렬하게 비틀듯, 관객과 시청자들의 인지도 차츰 깨어나 순식간에 격렬해진다. <문화방송> ‘음악캠프’의 게시판에 오른 글은 사태 발생 사흘 만에 만 단위를 숨가쁘게 돌파했다.
일시적인 인지마비에서 풀려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물론, 비판과 비난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드물게는 “해프닝 하나에 웬 호들갑이냐”며 여론을 나무라는 태도도 있다. 더 드물게는 “지상파 방송의 엄숙주의를 ‘방법’했다”거나 거꾸로 “지상파 방송의 선정주의의 희생양이 됐다”는, 보통사람의 이성과 감수성으로는 떠올리기 힘든 고차원적인 풀이가 나오기도 한다. 대중문화의 다양성을 귀히 여기는 쪽에서는 “인디밴드를 싸잡아 비난하지 말라”며 돌팔매의 십자포화 한가운데로 몸을 던지기도 한다.
대놓고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이런 반응도 있다. “여자 멤버가 나왔으면 어땠을까?”(다음 게시판). 공중파 바깥에서 여성 옷벗는 모습을 무시로 봐온 사람의 입맛 다시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꼬리 지느러미는 눈에 잘 띄지만, 배밑 지느러미는 웬만큼 움직여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입맛 다시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소리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함의가 풍부하다. 바지를 내린 게 여성이었다면 입맛 다시는 소리는 침 넘어가는 소리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놓쳐선 안 될 한가지. 바지를 내린 사람들과 입맛 다시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남성이다.
실제 화면 속에서는 남성이 바지를 내렸지만, 여성들은 침을 삼키지 않았다. 아마도. 대신 무서워하거나 불쾌해했다. 분명히. 한국성폭력상담소 김소연씨는 “아무리 인디밴드의 공연이라고는 하지만 퍼포먼스에 대한 사전예고가 없었던 건 분명하다”며 “‘선택가능성’이 배제된 상황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자신의 성기를 노출시킨 것은 그 자체로 성폭력”이라고 말한다. 문제의 남성 댄서들은 지상파에 출연한 ‘바바리맨’이었다는 얘기다.
남성 출연자가 생방송 도중 바지를 내린 것도 사상 초유의 일이기는 하지만, 여성 출연자가 현재 또는 미래의 직접적 또는 암묵적 이익을 노리거나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흥에 겹거나 예술혼에 불타, 생방송 도중 자발적으로 바지를 내릴 일은 더욱 없다. 아무렴.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또 있다. 바바리맨은 어느 여학교 앞에나 있지만 바바리우먼은 어디에도 없다. 사실상. 더욱 분명한 건 여성이 바지를 내렸다고 해도 여성들은 입맛을 다시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대신 서글퍼했을 것이다. 추정컨대.
남성이 벗으면 성추행이 되지만 여성이 벗으면 성적 만족의 대상이 된다. 적어도 양성차별이 심한 사회에서는 그렇다. 이번 사태를 두고 “홈쇼핑의 속옷광고와 다를 게 뭐냐?” 따위의 ‘쿨’한 반응을 보이는 일부 누리꾼들에 대해 한국성폭력상담소 김소연씨는 “여성의 몸이 상품화되고 대상화되어 그 자체로 섹시코드가 되어버린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다르다. 남성의 성기는 그 자체로 권력이며, 그 노출은 대상에게 폭력적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한다.
여성은 남성이 아무 데서나 옷을 벗으면 무서워하거나 불쾌해하지만, 여성이 아무 데서나 벗으면 (스스로를 성적 상품화한 그 여성을) 안타까워하거나 (성적 상품화된 그 여성을 보며) 서글퍼한다. 적어도 세계 최고 수준의 성범죄와 세계 최고 수준의 성매매시장이 존재하는 나라에 사는 여성은 그렇다. 대한민국 여성이 그렇다.
그러니, 대한민국에 사는 착한 남성은 아무리 흥에 겹거나 예술혼에 불타더라도 아무 데서나 바지를 내려선 안 될 일이다. 그건 분명 경범죄 이상의 폭력이다. 물론, 미리 짜고 한다면 계획범죄다. 대부분 성범죄가 그렇듯. 여성들이 못 벗게 말리거나 벗지 않아도 되게 손을 내밀지는 못할망정, 나를 포함한 남성들이여, 그들을 향해 진군나팔 따위는 제발 불지 말자.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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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공비행] 생방송 ‘생쇼’ 사건의 그들
저항의 무기랍시고 꺼낸게 고작 바바리맨의 그것이냐
‘바바리맨’은 신출귀몰하기도 하다. 여학교 앞 어스름한 골목길에서, 대낮의 지하철 안에서, 아침 출근길의 버스정류장에서, 그밖에 감히 상상치도 못했던 여러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대한민국 여성들은 그 ‘맨’들과 마주쳐 왔다. 자꾸 보다 보면 제법 익숙해지지 않느냐고? 미안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것이 폭력의 특성이다.
중학교 때 우리학교 앞에 단골로 나타나는 ‘맨’이 하나 있었다. 허구 헌 날 맞닥뜨리면서도 소녀들은 그를 목격할 때마다 꺅꺅 소리를 질러댔다. 한 선배언니가 말했다. “너희가 비명을 지르니까 그놈은 지가 잘나서 그런 거라고 오해하잖니. 앞으로는 놀란 척 하지 말고 그냥 무시해버려. 너는 하던 일 마저 해라, 나는 그냥 지나가겠다, 이런 표정으로!” 공포 섞인 비명으로 저를 맞이해야 마땅할 소녀들의 냉정하고 심드렁한 반응이 불만스러웠던지 얼마 뒤 그는 진짜 사라졌다. 물론 또 다른 새된 비명을 찾아 영업장을 옮겼을 테지만.
이쯤에서 그 얘기를 해야겠다.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그 사건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사건의 직접적인 목격자다. 지난 토요일, 날은 덥지, 쓰고 있는 소설은 안 풀려서 답답하지, 일도 안 되는데 밥은 먹어 뭘 하나 자책하며 밥 대신 수박을 썰어 입에 넣던 중이었다. 눈은 습관적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쫓고 있었다. 그때 그들이 나타났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처음에는 나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어, 지금 쟤들이 뭐하는 거지? 어, 어, 아니, 설마! 홀딱 벗은 채로 펄쩍펄쩍 점프를 해대는 그들을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청석이 쥐 죽은 듯 고요했던 건 다들 나처럼 할 말을 잃어서였을 것이다. 조금 뒤에야 내가 수박씨를 죄다 꿀떡 삼켜버렸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지는 것을 보면서 머리 싸매고 앉아 생각했다. 인간의 알몸을 바로 성적인 상징으로 치환시키는 것도 어찌 보면 위험한 발상이잖아. 걔들은 그 짓을 통해 나름대로의 저항정신을 표현하려 했는지도 몰라. 그래, 방송국에 대하여, 제도권에 대하여 지들 딴에는 ‘퍽 큐’ 한방 날리는 심정이었을지도 모르지. 하해와 같은 심정으로 이해해보려 애썼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몸의 기억은 끈질기고 강렬하다. 열댓 살 무렵부터 잊을만하면 한번씩 이 도시 곳곳에서 부닥쳐왔던 바바리맨들. 토요일 저녁의 일을 더듬어 생각할수록, 기억 속에 단단히 각인된 그 불쾌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 스멀스멀 되살아나서 나는 어지러워졌다. 결론은 자명하다. 그게 누구든 간에 인간에게는, 원치 않는 타인의 알몸을 보지 않을 자유가 있고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공중파 무대에서 ‘생 쇼’를 벌인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겠다.
사건의 배후에 어떤 치밀한 음모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뭣 같은 세상, 우리가 일 한번 벌려주지! 헤이, 거기 알록달록 풍선 흔들어대는 오빠부대 꼬마아가씨들, 귀엽고도 한심하구나, 오늘 한번 진하게 놀라 볼래? 어쩌면 이렇게 ‘쉽게’ 시작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에 한 표 던진다. 성폭력을 포함한 모든 폭력행위는 그렇게 알량한 권력을 과시하려는 같잖은 욕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부분은, 스스로 ‘저항’을 지향하는 인디밴드의 일원인 그들이, 딴에는 퍼포먼스라면서 짜잔 꺼내놓은 부위가 왜 하필 ‘성기’ 일까 하는 것이다. 처음 서는 방송국 생방송 무대에서 주눅 들지 않기 위해, 당당하고 자유롭게 맞장 깐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 젊디젊은 그들이 숨겨둔 비장의 무기가 겨우 그것이라니. 그 가진 것 없음과 부박한 상상력이 진심으로 애처롭기 그지없다. 아, 전통도 유구한 바바리맨의 슬픈 무기여, 이제는 제발 안녕! 소설가 정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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