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23 17:23
수정 : 2018.05.24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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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3호선과 6호선이 있는 연신내역 지하 에스컬레이터.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는 다른 곳이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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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경 청년유니온 초대 위원장, 불법촬영 피해자 도와
“성범죄 원인을 피해자 탓하는 반응이 깊은 생채기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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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3호선과 6호선이 있는 연신내역 지하 에스컬레이터.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는 다른 곳이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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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밤 9시40분께 서울 지하철 연신내역 한 출구에 있는 에스컬레이터. 한 남성이 치마 입은 여성 뒤에 서서 이상한 손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남성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확인하고 다시 내밀었다가 확인하는 동작을 서너 차례 반복했습니다. 처음엔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장난인가 했습니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서자 여성과 남성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유니온 초대 위원장 김영경(38)씨는 이때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남성의 가방을 잡으며 “지금 뭐 하신 거예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남성은 김씨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김씨는 쫓아가면서 외쳤습니다. “잡아주세요, 제발 잡아주세요” 남성은 빨랐습니다. 몇명의 남성이 막아서려 했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덩치 큰 남성이 앞을 막아섰고, 도망치던 남성은 신호가 걸려 차가 멈춰선 도로로 뛰어들어 건너편으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도주는 거기까지였습니다.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남성 둘이 뛰어왔고, 도망치던 남성은 결국 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김씨는 “그 사람 휴대전화를 뺏어야 해요”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렇게 ‘그 사람’의 휴대전화는 김씨 손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경찰 신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한 여성이 “제가 신고할게요”라고 했습니다. 그 여성의 얼굴을 본 김씨는 순간 눈앞이 노래졌습니다. 바로 피해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찍힌 것 같다”고 했더니 놀란 피해 여성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마침 옆에 있던 다른 여성이 경찰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이 ‘그 사람’을 현행범으로 검거했습니다.
김씨는 피해 여성이 안쓰러웠습니다. 경찰에 신고한 여성이 피해 여성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기에 “친구세요?”라고 물어보니 “모르는 분이에요”라고 했습니다. 신고한 여성은 이미 울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김씨도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세 명의 여성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피해를 일상이 된 자신의 피해처럼 받아들이고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역 앞에 있던 포장마차에서 한 남성이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도 잘못이 있네.”
피해 여성이 무엇을 잘못했다는 걸까요. 김씨는 “기진맥진해서 돌아서는데 서러웠다”고 했습니다. “범인을 잡아준 사람들도 남성들이고, 피해 여성이 경찰차를 타고 가야 할 때 경찰에게 지인이 없어서 혼자 가야 하는데 불안하지 않겠느냐며 끝까지 있어준 사람 중에는 남성들도 있었습니다. 그 포장마차 아저씨가 미울지언정 모든 사회, 모든 사람, 특정 성별을 온전히 미워하지 말자고 계속 심호흡을 합니다.”
김씨가 21일 새벽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한겨레>가 사실관계를 확인해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김씨는 사건 발생 2시간쯤 지난 20일 늦은 밤 경찰로부터 ‘잡힌 남성이 불법촬영 현행범이 맞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김씨의 의심이 사실로 확인된 겁니다.
하지만 그날의 범죄만큼이나 “여자도 잘못이 있네”라는 그 말 한마디가 김씨의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맥이 풀렸어요. 피해자는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길이의 헐렁한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불법촬영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말에 같은 여성으로서 서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불법촬영은 심각한 범죄인데, 현장에서 (포장마차 주인처럼)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불법촬영 범죄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가운 시선, 나 자신이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계기가 됐습니다.”
“여자도 잘못이 있네”라는 말 한마디는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성폭력 범죄들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대응을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피팅 모델들을 불러 사진을 찍자고 해놓고 성폭력을 저지른 ‘비공개 촬영회’ 관련 기사가 뜨면, “누가 보면 순진한 여자애 납치해서 협박으로 누드 사진 찍은 줄 알겠다? 시간당 10만~20만원 주는 촬영이 무슨 목적과 수위가 어느 정도일지 모르고 갔을까?”란 반응이 따라옵니다. 실제 이 댓글은 높은 공감 수를 기록하며 댓글창 상단에 올라와 있습니다.
18살 여고생이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렸더니, 여러 업체에서 피팅 모델을 구한다며 “시간당 5만원”을 제시하고 사진을 찍자며 연락해왔다는 <국민일보> 기사에는 “이 나라 여자들의 제일 큰 문제는 이중성이다”와 같은 댓글이 공감 추천 상위권에 올라 있습니다. “본인이 시급 5만원 받을 가치와 능력이 있는지 생각 좀 하고 살자”며 피해자를 탓하는 반응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도 그동안 여성이 피해자인 불법촬영 사건을 수사하면서, 어차피 범인을 검거하기 어려우니 포기하라거나 수사 과정에서 더 강력한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2차 가해를 해왔습니다. 지난 19일 서울 혜화역 일대에 모인 1만2천여명의 여성은 그런 사회에 대한 분노의 물결입니다.
김씨의 페이스북 글로 상황을 접한 여성들도 분노하고 있습니다. 김씨 글은 게재 이틀 만인 23일 오후 4시 현재 1700여명한테 ‘좋아요’와 ‘화나요’ 등의 공감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 글을 본 여성들은 댓글에서 “피해자 잘못 하나도 없어요. 뭐가 여자가 잘못이 있나요. 오늘도 비참하네요” “포장마차 주인 (반응이) 진짜 현실인 것 같아요. 갈 길이 머네요” “(과거 불법촬영 피해자로서) 지금도 누가 휴대전화만 들면 날 찍는 것 같아서 대중교통에서 내릴 때 그 사람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하고 내리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 화면에 갇혀 살고 있어요” 등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래도 여전히 “여자도 잘못이 있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까요?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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