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불법촬영, 편파수사… 분노한 여성의 목소리가 거리를 메웁니다. 반성폭력 운동을 넘어 진정한 성평등을 위한 인식 개선과 사회·정책적 진보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쏟아집니다. <한겨레>는 ‘2018년 한국’만큼이나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는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낙태죄 폐지운동을 벌이는 아르헨티나 여성들, 여성 할례 폐지를 위해 분투하는 케냐 여성들, 국제결혼 귀환여성들을 돕는 베트남 여성들, 히말라야 트레킹을 통해 자립을 모색하는 네팔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페미니즘으로 연결된 여성의 목소리로 세계지도를 새롭게 그려봅니다.
지난달 11일 케냐 미고리주 쿠리아에서 ‘여성 청소년에게 안전한 공간을’이라는 주제로 열린 ‘2018 청소년 포럼’에 쿠리아족 여성 청소년 200여명이 참여해 함께 뛰고 있다.
8월에 부는 아프리카 대륙의 선선한 바람이 흰색 천막을 간질였다. 분홍색 티셔츠를 나눠 입고 천막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이들의 눈동자가 곧 마이크를 쥔 캐서린 멩가니(24) 활동가에게로 향했다. “‘이곳’은 제 몸이에요. 아무도 만져선 안 돼요. 아무도 쳐다봐선 안 돼요.” 동요 ‘머리 어깨 무릎’을 개사해 노래를 부른 캐서린은 ‘이곳’를 말할 때 자신의 가슴과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일어나서 같이 따라 해볼까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사타구니를 가리키던 아이들 사이에서 곧 웃음이 터져나왔다. 캐서린이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쉿.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우리 몸을 지킬 줄 알아야 해요.”
지난달 11일 세계 청소년의 날을 맞아 케냐 미고리주 쿠리아 지역에서 여성인권단체 ‘음시차나 임파워먼트 쿠리아’(MEK, 이하 음시차나 재단) 주최로 열린 ‘음시차나 청소년 포럼’을 찾았다. 쿠리아는 수도 나이로비에서도 차로 7시간 들어가야 나오는 케냐 최서남단 지역이다. 스와힐리어로 ‘소녀’를 의미하는 ‘음시차나’(Msichana)라는 제목처럼 포럼이 열린 도서관 앞 잔디밭은 200여명의 쿠리아족 여성 청소년들로 가득 찼다. “‘에프지엠’(FGM, 여성 성기 훼손)은 왜 나쁜가요?” 캐서린의 질문에 아이들이 손을 들고 대답했다. “에프지엠은 우리의 자유를 침해해요.” “에프지엠은 건강에 나빠요.” 의자에 앉은 아이들은 행여 놓칠세라 친구들이 내놓은 답을 공책에 빼곡히 적어 내려갔다.
■ 에프지엠에서 파생되는 성차별 ‘여성 청소년에게 안전한 공간을’이라는 주제의 이번 포럼은 음시차나 재단 주최로 열렸다. 2013년 설립된 음시차나 재단은 쿠리아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풀뿌리 비영리 단체로, 주로 에프지엠 및 조혼 근절 활동을 한다.
“에프지엠은 우리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할 뿐만 아니라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해요. 혹시 에프지엠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꼭 음시차나 센터를 찾아주세요.” 음시차나 재단의 나탈리 로비 팅고(26) 대표가 천막 앞에 서서 말하자 아이들의 대답이 울려 퍼졌다. “사와!”(스와힐리어로 ‘네’라는 의미)
가장 최근 통계인 2008년 ‘케냐 인구 보건 조사’를 보면, 쿠리아는 여성 인구의 96%가 에프지엠을 경험했을 정도로 케냐에서도 에프지엠 비율이 높은 곳으로 꼽힌다. 음시차나 재단 설립자인 나탈리 역시 쿠리아 출신이지만 ‘운 좋게도’ 에프지엠을 피할 수 있었다. 딸의 에프지엠 여부와 시기는 보통 부모가 정하는데, 나탈리의 어머니가 강하게 에프지엠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나탈리는 “신체적 고통은 없었지만, 가족에게 쏟아지는 주변 사람들의 비난은 가혹했다”고 기억했다. “특히 아버지 친척들이 공동체 전통을 깼다며 엄마를 많이 비난했어요. 14살엔 다른 마을로 이사도 가야 했고요.”
에프지엠을 하지 않은 나탈리는 마을을 떠나야 했고, 에프지엠을 한 나탈리의 친구들은 조혼으로 학교를 떠나야 했다. 에프지엠에서 파생되는 성차별을 마주하며 나탈리는 자연스럽게 여성인권에 눈을 떴다. “여자아이들이 에프지엠을 피해 도망쳤다면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을 졸업한 뒤엔 바로 쿠리아에서 에프지엠 반대 운동에 뛰어들었고요.” ‘프리다 영 페미니스트 재단’ 등 여러 재단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음시차나 재단은 5년 만에 9명의 활동가와 봉사자를 갖출 정도로 규모를 늘렸다.
케냐 미고리주 쿠리아의 ‘미스차나 도서관’에서 진행된 방과후 활동에 참가한 여성청소년들이 영어단어 받아쓰기 시험을 본 뒤 서로 문제를 채점해주며 웃고 있다.
케냐 미고리주 쿠리아 이커리지 마을의 교회 공원에서 ‘미스차나 쿠리아 임파워먼트’(MEK) 활동가들이 가져간 생리대를 여성청소년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 “쿠리아여, 잘 들어주세요. 에프지엠은 불법이고, 이제는 끝내야 합니다.” 10일 오전 음시차나 도서관에서 열린 ‘제1회 여성 성기 훼손 및 조혼 근절 케냐 청년 대회’에서 스와힐리어 가사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여성인권 활동가, 마을 주민 등 참가자 150여명이 흥겨운 젬베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에프지엠을 끝낼 것입니다, 당신은요?” 나탈리 대표가 선창하자 사람들이 외쳤다. “네, 저도요!”
음시차나 재단이 진행한 이번 행사에는 케냐 곳곳에서 활동하는 에프지엠 반대 청년활동가 30여명도 모였다. 초록색 히잡을 쓴 사디아 후세인(31)도 에프지엠 생존자이자 반대 활동가다. 후세인이 속한 ‘다야 위민 그룹’(DWG)은 케냐 남부 타나리버주에서 활동하는 단체로, 에프지엠 생존자 20여명이 모여 2008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저도 열살 때 스스로 에프지엠을 해야 했는데, 첫딸을 낳았을 땐 감염 때문에 수술을 해야 했을 정도로 계속 고통을 겪고 있어요.”
후세인처럼 여성에게 에프지엠은 과다출혈과 트라우마, 출산의 고통 등 평생에 걸쳐 이어지는 악몽이다. 그러나 마을에서 에프지엠은 보통 ‘수확’의 시기인 12월에 진행되는 마을 축제로 여겨진다. 에프지엠 근절을 위해 공동체 모두를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지역을 찾으면 꼭 남성 지도자들을 초대하려고 노력해요. 계속 찾아가서 논쟁하고 설득하죠. 마을에 침묵만이 흐른다면, 그건 곧 고통을 당하는 소녀들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후세인이 말했다.
‘여성 성기 훼손은 인권 훼손이다.’ 본인이 겪은 고통을 다음 세대로는 전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다짐은 조금씩 케냐를 움직이고 있다. 1990년부터 일부 형태의 여성 할례를 금지한 케냐는 2011년에는 정부 부처 산하의 반자치기관인 ‘에프지엠 반대 위원회’(AFB)를 꾸려 에프지엠 폐지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케냐 전역의 에프지엠 시행 비율이 1998년 38%에서 2003년 32%, 2008년 27%로 점차 낮아지는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쿠리아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움튼다. 11일 포럼에 참가한 쿠리아 청소년 저스티나 벤슨(13)도 에프지엠을 겪지 않았다. “할머니가 마을 아이들에게 에프지엠을 하는 분이셨거든요. 근데 음시차나 재단 포럼에 다녀오고 나서 3년 전부터 에프지엠을 그만두셨어요.” 벤슨의 꿈은 케냐의 첫 여성 대통령이다. “여성 대통령이 대변할 수 있는 여성들의 문제가 있잖아요. 대통령이 되어서 케냐 사람들이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일하고 싶어요.” 음시차나 재단의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에프지엠을 피한 12~16살 쿠리아 여성 청소년들은 지금까지 700여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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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리대를 그냥 나누는 이유 12일 오후, 음시차나 재단의 나탈리 대표와 막달린 마주마 활동가가 사무실에서 5㎞ 정도 떨어진 이케레게 마을로 향했다. 이들이 탄 오토바이에는 생리대 30개들이 한 박스가 실렸다. 쿠리아 지역 곳곳에 퍼져 있는 12~16살 여성 청소년 300여명에게 교육 프로그램과 함께 학용품, 생리대 등을 제공하는 ‘나웨자(스와힐리어로 ‘나는 할 수 있다’는 뜻)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이케레게 마을의 한 교회에 도착한 나탈리와 막달린이 여성 청소년 20여명과 함께 둘러앉았다. “지난 시간 수업에서 피임에 대해 궁금하다는 질문이 있었어요. 만약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를 한다면 반드시 피임을 해야 해요. 원치 않은 임신을 막고, 성병을 예방할 수 있으니까요.”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스와힐리어와 영어를 섞어 30분 남짓 이야기를 이어간 막달린은 수업이 끝난 뒤 아이들에게 9월에 사용할 생리대를 하나씩 나눠줬다.
음시차나 재단은 초기 쿠리아 지역에 만연했던 에프지엠을 근절하기 위한 운동에 집중했지만, 여성문제에는 가난·가뭄과 같은 외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고민에 활동의 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에프지엠에 가장 취약한 계층은 바로 지참금을 받기 위해 조혼에 내몰리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는 가난한 집안의 여자아이들이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09년 기준 미고리주의 고등교육 수혜 비율은 15%로, 여성은 이보다 훨씬 낮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여자아이가 밥을 먹지 못하거나 생리대를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다면, 가장 먼저 학교에 못 가게 돼요. 아이들이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생리대나 학용품도 최대한 제공하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막달린이 말했다.
음시차나 재단은 지난해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공터에 여성 청소년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음시차나’ 도서관을 지었다. 여성이 차별과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결국 안전하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시멘트로 벽을 세우고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1층짜리 단출한 건물이지만, 일주일에 300명에 가까운 쿠리아족 여성 청소년이 이곳을 찾아와 영어·수학 등 방과 후 학습을 한다.
■ 이들이 일구는 페미니즘 유토피아 쿠리아의 ‘스마일링 차일드’라는 의료 봉사 단체에서 일하는 캐서린 차차(28)는 한달 전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쿠리아의 14살짜리 여자아이가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하게 됐는데, 여자아이의 엄마는 단체를 찾아와 딸의 임신중단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엄마는 딸이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중단을 하길 원한 게 아니었어요. 에프지엠도 하지 않았는데 임신을 해 수치스럽다는 게 이유였죠.” 에프지엠이 만연한 쿠리아 사회에서 성폭행은 남성의 범죄가 아닌 여성의 행실 문제가 되는 것처럼, 여성을 향한 폭력이 상존하는 현실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마저 뒤집는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여성인권을 위해 싸우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아요. 다음 세대 아이들은 언젠가 우리의 활동에 고마워할 날이 올 거예요.” 차차가 힘주어 말했다.
물론 케냐의 여성인권 활동가들이 수천년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된 악습에 맞서는 일은 쉽지 않다. 남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공동체에서는 전통을 파괴하려 한다는 반발도 견뎌야 한다. 나탈리 대표가 말했다. “성평등은 결국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가 책임을 지고 함께 싸워야 하는 문제예요.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있는 거고요. 페미니즘은 여성을 향한 편견과 폭력, 불평등한 믿음을 박살 내요. 이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은 모두 페미니스트죠.”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18년 기획취재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여성 성기 훼손, 조혼으로 대표되는 아프리카의 여성인권은 사전적 의미인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곳에는 에프지엠과 조혼 위기에 처한 여자아이들을 구하는 여성들이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여성들이 있다. 페미니즘을 추구하고 성평등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을 바로 ‘페미니즘 유토피아’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쿠리아/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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