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9.18 19:33
수정 : 2018.09.18 21:37
[짬] 독일 풍경세계문화협의회 이은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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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풍경세계문화협의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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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대로라면 지난 8월 14일 독일 본 여성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평화의 소녀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마리안느 피첸 박물관장이 지난해 8월 풍경세계문화협의회(이하 풍경)에 공문을 보내 건립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날짜까지 8월 14일로 못 박았다. 풍경은 소녀상 건립을 위해 독일 동포와 현지인 10여 명이 지난해 12월 만든 공익법인이다.
본에 세우려 한 소녀상은 독일(전 유럽)의 2호 소녀상이다. 1호는 지난해 3월 독일 남부 도시 비젠트의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에 들어섰다. 경기도 수원시민과 독일 동포들이 합심해 세웠다. 하지만 1호는 비문이 없는 미완의 기림비다. 애초 건립식 뒤 위안부의 역사적 배경 등을 담은 비문을 소녀상 하단에 부착하려 했으나 일본 쪽 항의로 무산됐기 때문이다.
풍경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이은희 풍경 대표는 지난 15일(현지시각)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완인 첫 소녀상에 대한 아쉬움이 컸어요. 제대로 된 소녀상을 세우려고 독일 동포와 현지인이 직접 나섰죠.”
‘2호 소녀상’은 현재 본이 아니라 독일 북부 함부르크에 머물고 있다. “소녀상이 7월 초 함부르크에 들어오기로 했는데 6월 21일 피첸 관장한테서 건립식을 못 연다는 통보가 왔어요. 강두원 풍경 부대표와 마틴 슈미트-마긴 풍경 미술감독과 함께 바삐 움직여 일단 함부르크 전시 계획을 세웠죠.”
소녀상은 지난달 14일부터 9월 28일까지 함부르크 도로테에 죌레 하우스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곳엔 북독일 개신교 루터 교단의 26개 단체 및 기구가 둥지를 틀고 있다. 풍경은 지난달 18일 본 여성박물관에서 건립식 대신 위안부 문제를 독일 사회에 알리기 위한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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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함부르크 도로테에 죌레 하우스에서 전시 중인 평화의 소녀상. 지난달 14일 시작된 전시는 이달 28일 끝난다. 함부르크 전시 뒤 소녀상이 영구히 머물 곳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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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건립이 불발된 사연을 물었다. “내년부터 여성박물관에 대한 시 예산 지원이 대폭 줄어듭니다. 이런 이유로 박물관 운영진은 이번 기회에 박물관을 시로부터 사들이려고 협의를 해왔어요. 시 공무원들이 7~8월 휴가철에 잘 움직이려 하지 않아 올 상반기에 끝내려 했던 매입 절차가 늦어지고 있다는 게 관장의 공식 해명입니다. 자신들이 박물관 주인이 아니라 아직 소녀상을 세울 준비가 안 됐다는 거죠.”
하지만 내막을 살피면 일본 쪽 압박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론이 쉽게 나온다. 풍경은 지난 4월 28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교회에서 소녀상 건립 기금 마련 콘서트를 했다. “콘서트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며칠 뒤 시 문화국에서 박물관 쪽에 소녀상을 세우려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답니다. 곧 일본 영사들이 찾아갈 것이란 말도 전하면서요.” 콘서트 뒤 꼭 일주일 만에 뒤셀도르프 일본 부총영사와 영사관 직원이 박물관을 찾았단다. “부총영사가 다녀간 뒤 박물관 쪽에서 풍경에 ‘너무 불안해하지 마라. 일본 쪽에 이미 일어난 역사를 되돌리려고 해선 안 된다고 했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어요. 일본 쪽은 관장에게 위안부 피해자 숫자가 부풀려졌다, 위안부들은 돈을 벌기 위해 매춘을 했다는 등의 말을 했다고도 알려줬죠.”
동포·현지인 10여명 공익단체 ‘풍경’
본 여성박물관에 ‘위안부 기림비’ 추진
박물관 ‘건립식 취소’…일본 압박 탓인 듯
“제3의 장소도 고려…기금 모금중”
지난해 ‘1호’ 건립 때도 사무국장 활동
2010년부터 발행한 잡지 ‘풍경’ 휴간
이 대표는 1호 소녀상을 세울 때도 독일 쪽 건립추진위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그때도 수원시민들은 애초 자매 도시인 프라이부르크시 공공부지에 소녀상을 세우려 했으나 일본 쪽 압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기림비 건립을 추진하는 수원 쪽 관계자로부터 참여 요청을 받고 처음엔 망설였지만 일본이 방해한다는 말을 듣고 참여하기로 했죠.”
그는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소녀상 건립에 열의가 있는 분들과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짜고 있어요. 여성박물관 내 건립이 무산된다면 제3의 장소에 세우는 것도 고려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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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저널> 전면에 게재된 독일 ‘평화의 소녀상’ 프로젝트 후원 광고. (* 이미지를 누르면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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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개월 동안 펼친 모금 운동엔 동포 50여 명이 참여해 1만 유로를 모았다. “국제신선합기도협회 고명 총재가 2천 유로를 선뜻 내주셨어요. 재독한인총연합회(회장 박선유)도 앞으로 단체 차원에서 지원하기로 했어요. 독일 신부님 소개로 한국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도 지원을 결정했고, 미국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 소녀상을 세운 가주한미포럼(대표 김현정)도 큰 도움을 줬죠.”
풍경이란 이름은 그가 2010년부터 동포 상대로 펴내온 월간지 이름에서 따왔다. “독일어라는 외국어 피로감에 젖어 사는 동포들에게 음악, 전시 등 문화 정보를 한글로 풀어 전달하려고 잡지를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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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대표가 발간하고 있는 월간지 <풍경> 81호 1면. (* 이미지를 누르면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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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는 이 대표가 소녀상 건립에 매달리면서 2016년부터 휴간 중이다. “재작년 여름부터 잡지 광고 사정도 좋아졌는데 기림비 일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더라고요. 2009년부터 해 온 한국인 상대 독일어 강습도 중단했죠.”
1960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 대표는 부산대 독문과를 마치고 83년 프랑크푸르트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박사를 따지 못한 채 95년 귀국해 강사와 번역 일을 하다 3년 뒤 다시 독일로 향했다. 2005년 만난 독일인 남편은 교회음악 전공자로, 2년째 음악 전문서점도 운영하고 있다. 남편의 책방이 이 대표의 사무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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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대표가 지난 4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크로이츠 교회에서 열린 소녀상 건립 후원 콘서트에서 건립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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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98년 2차 독일행을 한 뒤론 독문학 공부보다는 저널리스트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2003년부터 1년 넘게 <교포신문> 편집장도 했죠. 2009년 한국 대기업 독일어 강사로 출강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어요. 그때 내가 직접 매체를 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편도 필요할 때마다 재정적인 도움을 줬어요.”
이 대표는 독일 사회 우경화에 대한 우려가 크다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많이 걱정되는 건 사실이죠. 어느 사회나 우경화 혹은 좌경화 쏠림 현상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럴 때마다 사회가 어떻게 논의해 문제를 지적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느냐가 중요하죠. 독일은 다행히 저널리즘 성숙도가 높은 편입니다. 언론이 제구실을 하고 있어요. 아직도 종이신문이 버티고 있잖아요.”
후원 문의
pwkdeutschland@gmail.com.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이은희 대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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