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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02 18:56 수정 : 2018.10.04 15:19

【짬】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김희선 회장

김희선 회장은 인터뷰 도중 “나는 결혼을 잘 했다”는 말도 했다. 남편인 방국진 4월혁명회 공동의장이 아내의 사업회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는 말 끝이었다. 강성만 선임기자

“3·1 운동 100년이 되는 내년 3월엔 여성 독립운동가 기념 조형물을 서울역 앞에 세우려고 해요.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작가 부부에게 제작 의뢰도 해놓았죠.”

설립 4년째인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김희선 회장을 지난 1일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1년 가까이 조형물 세울 땅을 찾아다녔어요. 쉽지 않더군요. 서울역 앞도 보훈처나 한국철도공사 쪽은 긍정적이지만 서울시나 문화재 당국과의 협의가 더 필요해요. 논의가 잘 이뤄져 내년엔 시민들이 여성독립운동가 조형물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1919년 간도의 애국부인회가 만든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석판으로 만들어 학교에 보내는 운동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3·1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함께 접할 수 있다면 역사의식을 깨치는 데 도움이 되겠죠.”

그는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회장에게 국회의원 출신 시민단체 대표는 드문 것 같다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저는 국회의원의 공약은 평생 간다고 생각해요. 지역구(동대문구) 출마 때 제 공약이 친일파 청산이었죠. 지금 활동도 그 공약을 지키기 위한 것이죠. 항일 여성운동가 조명은 친일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이었는지를 보여주는 활동이기도 해요. 사업회 사무실도 의원 시절 지역구 사무실로 쓰던 곳입니다.”

그는 의원 시절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결성을 주도했고 2004년 친일진상규명법 제정에도 앞장섰다. 법 제정 1년 뒤 대통령 직속으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가 설치됐다. 규명위는 4년 활동 끝에 김성수 〈동아일보〉 창업주,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주 등이 포함된 반민족행위자 명단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김 회장은 보수언론의 마녀사냥식 공세를 견뎌야 했다.

왜 친일 청산이었을까. “친일파가 난무하는 사회에 뭔가 경고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죠.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이 뼛속 깊이 있었죠.”

그는 독립운동가 후손이다. 작은 조부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조선혁명군 참모장과 광복군 3지대장을 지낸 김학규(1900~67) 선생이다. 김 선생의 부인이자 그의 작은 조모인 오광심(1910-76) 선생도 만주를 누빈 광복군이었다. “친할머니로부터 ‘만주 살 때 집에서 닭을 잡아 노란 기름은 독립군 총 닦는 데 쓰고, 삶은 닭고기는 독립군들에게 보냈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죠.”

그는 1943년 중국 봉천(현 심양)에서 태어났다. “해방 뒤 평양에 살던 할머니가 저를 등에 업고 삼팔선을 넘었어요. 서울에 와선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던 숭인동 82번지에서 살았죠. 초등학교 다닐 때 백범 암살 배후로 몰린 작은 조부께서 경기도 평택의 우리집 구석방에 숨어 지냈어요. 그때 제가 신문도 가져다 드리면서 독립운동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1948년 단독정부 수립과 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은 선조의 독립운동 행적을 얘기해선 안 되는 땅이 되었단다. “독립운동했다면 빨갱이 집이라고 했죠. 50년대 사회 분위기가 그랬어요.”

친일진상규명법이 통과되고 14년이 지났다. “친일파 나라라는 점은 변화가 없어요. 돈은 다 그쪽이 쥐고 있잖아요. 저는 그동안 (친일파 감시 압박에) 발가벗고 살아왔어요.”

왜 사업회를? “2013년 10월께 사학자인 이덕일 소장과 이만열 교수 등을 만난 자리에서 ‘유관순만 여성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는 말이 나왔죠. 그뒤 바로 남자현, 윤희순 등 여성 독립운동가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여성 독립운동가 행적을 배우면서 부끄럽고 머리에 열이 나서 두 달 정도 잠을 못 잤어요. 사업회를 만들자고 결심했죠.”

사업회엔 2명의 상근자가 더 있고 후원 회원은 300명 정도 된단다. “4년 동안 가장 힘쓴 일은 항일 여성들을 알리는 활동이었죠.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원’ 글자를 쓴 남자현 의사나 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져 7년 옥고를 치른 안경신 의사 등을 알리는 강좌를 열었어요. 영화 <밀정>(2016) 기획자인 이진숙 대표도 사업회가 마련한 3개월 과정 교육 1기 수료생입니다.” 지난 8월엔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소재로 한 ‘청소년 랩 배틀 대회’를 열기도 했다.

2014년 사업회 꾸려 ‘여성 항일’ 조명
3·1 운동 100돌 앞두고 조형물 추진
“내년 서울역 앞 건립 목표로 협의중”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석판 학교 보급도

“기록에 없는 여성들 헌신도 인정해야”
의원 시절 친일진상규명법 제정 주도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연설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에 적극 나서겠다고 했다. 그리고 여성 독립운동가 26명을 포상했다. 하지만 1949년 이후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 1만5천여명 중 여성 비율은 여전히 2%다.

그는 이번에 여성 독립운동가 이화림(1906~96) 선생이 포상을 받지 못한 게 특히 아쉽단다. “백범과 함께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기획하고 도운 분입니다. 의열단 활동도 지원했죠. 그런데 <백범일지>에도 이런 내용이 안 나와요. 이번에 포상을 받은 분들은 대개 후손들이 회고록 등을 통해 기록을 남긴 경우죠.”

그는 “남자 독립운동가가 1만5천명이었으면 여자도 그 정도 숫자로 보는 게 맞다”고 했다. “남편이 독립운동하러 떠나면 아내는 집에서 시부모 봉양을 했고, 돌아가시면 아이들을 둘러업고 만주로 쫓아가 남편의 활동을 뒷바라지를 했어요.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면 여성들의 이런 활동을 독립운동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여성들이 무기를 나르고 ‘삐라’를 뿌리고 경고문을 붙이고 군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많이 했어요. 이 헌신을 국가가 인정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누가 이런 가시밭길을 가려고 하겠어요.”

김희선 회장
독립운동가 집안 자녀들이 대개 그렇듯 그도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다. 공식 학력은 대전여상 2년 중퇴다. “고교를 그만 둔 뒤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박영준 당시 한전 사장 배려로 한전에 들어갔어요. 한전에서 남편을 만나 26살에 결혼했어요.”

사회운동가의 삶은 결혼 뒤 퇴직하고 서울 미아리에서 살 때 쓰레기 처리 문제로 구청과 싸우면서 시작됐단다. “쓰레기 수거를 요구하며 지역운동을 했어요. 이어 70년대 초반 서울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소비자보호 운동에 뛰어들었죠. 그 뒤로 여성운동(김 회장은 매 맞는 아내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시킨 여성단체 ‘여성의 전화’ 초대 원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으로 나아갔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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