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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17 16:19 수정 : 2019.01.17 22:18

피해자 김은지(가명)양이 남긴 일기장.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을 혼내줄 거라 믿고 교감 선생님이 불러서 갔는데 자신만 믿으라고 알았다고 다 해결해주겠다 하면서 중요한 내 얘기를 잘 안 듣고 이상한 말만 하면서 자꾸 내 몸을 만진다. 수치심이 들고 더럽다. 뱀 손가락 시커먼 손이… 뱀 손가락 뱀 손가락 뱀 손가락…’이라고 적혀 있다. 손씨 제공.

주민번호부터 일기장·카톡 기록까지
법원이 허가하자 공공기관 무분별 내줘
피해자 부모 “보복 두려워 떨어” 눈물
“방어권 인정돼도 피해자 보호대책 필요”

피해자 김은지(가명)양이 남긴 일기장.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을 혼내줄 거라 믿고 교감 선생님이 불러서 갔는데 자신만 믿으라고 알았다고 다 해결해주겠다 하면서 중요한 내 얘기를 잘 안 듣고 이상한 말만 하면서 자꾸 내 몸을 만진다. 수치심이 들고 더럽다. 뱀 손가락 시커먼 손이… 뱀 손가락 뱀 손가락 뱀 손가락…’이라고 적혀 있다. 손씨 제공.
지난해 11월 손아무개씨는 법원 누리집에서 10대 딸과 관련한 사건을 조회한 뒤 깜짝 놀랐다. 딸은 충남 천안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교감으로 근무했던 임아무개(57)씨에게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 집단 따돌림과 학교 폭력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딸을 “도와주겠다”며 상담하던 도중 상습적으로 추행한 혐의다. 임씨는 지난해 7월부터 성폭력범죄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13살 미만 미성년자 강제추행) 혐의로 대전지법 천안지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각종 공공기관에서 피해자인 딸의 개인정보를 무더기로 피고인 쪽에 넘겨준 사실이 누리집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손씨는 법원에 항의한 뒤 피고인에게 제공된 자료를 받아봤다. 자료를 받은 손씨는 더 큰 충격에 빠졌다. 주민등록번호 등 기본적인 개인 정보는 물론이거니와 일기장과 편지, 친구들과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병원 진료기록과 병명, 학교생활통지표와 심리상담 소견서까지 낱낱이 임씨 쪽에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털렸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이름과 주소만 알려져도 보복이 두려워 떨어야 하는데….” 지난 11일 <한겨레>와 만난 손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손씨 딸의 피해를 알려면 2015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손씨의 딸 김은지(가명)양은 초등학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김양이 따돌림당한 또 다른 친구를 배려하고 챙겼다는 이유였다. 괴롭힘은 집요했다. 결국 김양은 등교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손씨는 학교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연락을 해온 사람이 교감인 임씨였다. 그러나 임씨는 상담을 빌미로 학교 곳곳에서 김양을 약 3개월 동안 상습적으로 추행했다.

학교 폭력 사건 해결을 위해 자료를 모으던 손씨는 김양의 일기장을 보고서야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됐다. 김양은 일기장에서 임씨를 ‘뱀 교감’이라고 불렀다. 김양은 일기장에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을 혼내줄 거라 믿고 교감 선생님이 불러서 갔는데 자신만 믿으라고 알았다고 다 해결해주겠다 하면서 중요한 내 얘기를 잘 안 듣고 이상한 말만 하면서 자꾸 내 몸을 만진다. 수치심이 들고 더럽다. 뱀 손가락 시커먼 손이… 뱀 손가락 뱀 손가락 뱀 손가락…’ ‘교감 선생님 손가락에서 뱀들이 나온다. 무서운 뱀들이 나와 날 만진다’ ‘감옥에 가서 벌 받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날 절대 찾아오지 못 할 테니까’라고 적었다.

임씨는 결국 지난해 7월13일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임씨는 곧 변호인을 통해 사실조회촉탁 신청서를 제출했다. 사실조회촉탁이란, 공공기관, 학교, 그 밖의 단체, 개인 또는 외국의 공공기관에 그 업무에 속하는 특정사항에 관한 조사 또는 보관 중인 문서의 등본, 사본의 송부를 촉탁해 증거를 수집하기 위한 절차를 말한다. 임씨의 변호인은 피고인 방어권 차원에서 법원을 통해 학교안전공제회, 국민건강보험공단, 충남도청, 중앙행정심판위원회, 임씨와 김양이 다닌 초등학교, 시교육청 위(wee)센터 등에서 김양과 관련한 자료를 받아갔다. 자료는 △병원진료·심리상담 기록 △생활기록부 등 학교생활자료 △학교폭력 사건 당시 피해자가 제출한 자료 등 크게 3가지 종류였다.

손씨가 법원을 통해 임씨 쪽에 넘어간 자료의 사본을 확인한 결과, 자료에는 김양의 휴대전화 번호와 생년월일 등이 전혀 가려지지 않은 상태로 공개됐고, 김양이 학교 폭력 당시 어떤 부분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 진술한 심리상담기록지까지 낱낱이 제공되어 있었다. 생활기록부는 전 학년에 걸쳐서 제공됐다. 특히 생일날 친구들이 써준 카드와 학교 글짓기에서 작성한 글, 일기장에 써둔 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기록을 제출한 공공기관들은 <한겨레>에 “법원이 요청해서 제공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자료제공 여부조차 “답변이 어렵다”고 한 천안교육지원청을 제외한 학교안전공제회, 충남도청, 중앙행정심판위원회 등은 “법원에서 요청해서 자료를 제출했다. 서류상으로는 (자료를) 피고인이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이에 대해 “이름과 주소, 주민번호 등은 모두 지우고 제공했다. 다만 일기장 등 기관에서 제출한 자료를 따로 선별하지 않고 모두 다 피고인 쪽에 넘긴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피의자의 방어권 차원에서 일정 정도의 정보 열람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법원의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팀장은 “최근 사실조회촉탁 신청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호소하는 사례가 많아지는 추세”라며 “성폭력 피해를 신고했다는 이유로 사건과 관련 없는 정보들까지 제출된다면, 적극적인 신고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법원 내부에서 사건과 무관한 정보는 사실조회촉탁 신청을 받아주지 않거나 피해자 동의를 받게 하는 등의 규칙을 내부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혜진 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방어권은 피고인이 갖고 있는 헌법상 권리”라면서도 “피고인의 공소사실 입증과 관련 없는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료를 구체화하고, 세부적으로 특정해야 했다. 그랬다면 피해자의 모든 인적사항과 학교생활이 담긴 정보가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피해자 김은지(가명)양이 꼭 안고 잔다는 경찰 인형. 손씨 제공.
김양은 여전히 교감이 자신을 찾아올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한다. 손씨가 딸과 함께 집을 나와 따로 구한 방에서 생활하고 있는 까닭이다. 김양은 멘토 경찰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뱀 교감이 내가 사실을, 진실을 다 말한 걸 알고 절 납치하거나 죽이진 않겠죠?”라고 물었다. “뱀 교감이 저를 납치하면 구출해주실 거죠? 그쵸? 아저씨”라고 적기도 했다. 아직도 김양은 “길에서 교감을 봤다”면서 집으로 뛰어들어온다고 한다. 김양은 멘토 경찰관에게 경찰 인형을 선물 받았다.

“그 인형을 꼭 안고 자야 잠을 자요.” 손씨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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