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올림픽’이 끝나고 태어났다. 스무살이 되던 해, 실력만 있으면 유리천장쯤은 부술 수 있다는 ‘알파걸’이 등장했다. 서른이 되자 직장에선 자책감을, 가정에선 죄책감을 느끼는 ‘슈퍼우먼’ 선배들이 보였다. 여성의 생존과 성공에 대한 서사는 늘었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판의 기울기는 변함이 없었다. 이 판 자체에 균열을 내는 방법은 없을까. ‘알파걸’도 ‘슈퍼우먼’도 주지 못한 답을 찾고 싶어, 또래 여성들을 만나러 나섰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지난해 6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고은영 전 제주도지사 후보가 트럭 위에 올라가 유세를 하는 사진을 봤을 때, 나는 미술책 어딘가에서 봤던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떠올렸다.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달랑 마이크를 하나 들고 결기에 찬 모습으로 정치유세를 하는 젊은 여성의 모습은 내게도 너무나 생경했기 때문이다.
‘걸크러시’란 바로 이런 것. 제주녹색당·고은영 제공
최초의 여성 도지사 후보, 최연소 청년 도지사 후보, 최초의 ‘이주민’ 도지사 후보. 호기심에 찾아본 고은영이란 이름 앞엔 ‘최초’란 수식어가 여럿 붙어 있었다. 패기는 있다손 쳐도 되려 설익음만 각인되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이 앞섰다.
기우였다. 제주는 ‘최초’의 외침에 응답했다. 제주녹색당의 후보였던 그는 1만2188표(3.53%)를 얻었다. 3위다. 원내 2, 3당인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을 제쳤다. ‘30년 서울 토박이’인 여성이, 대체 제주의 정치판에 어떤 균열을 내고 있는걸까. 궁금했다. 지난달 27일 제주로 향했다. 그 한 장의 사진을 들고서.
#1. 나는 근본없는 ‘제주 성덕’ 고은영이야―안녕! 고은영을 한 마디로 소개한다면 어떤 사람이야?
난 ‘제주 성덕’ 고은영이야. 제주를 짝사랑하는 수많은 청년 중 한 명이었는데 이젠 내가 제주를 좀 더 ‘녹색녹색한 곳’으로 바꿔보겠다는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어.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되는 걸 ‘성공한 덕후’라고 하잖아. 난 ‘성덕’인거지. 거리에 나오면 내 이야기에 동조하고, 마음을 모아주고, 구심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어.
정치는 생각보다 재밌어. 할만해.
요즘은 지역을 사랑하는 그 지역의 ‘덕후’가 실제로 정치를 해서 ‘정치 덕후’가 되는 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제주 덕후’ 계파의 시초”라고 말하곤 해ㅎㅎ 제주를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거점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여기 사는 생명의 존재를 인정하는 시선으로 제주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제주덕후’ 계파야.
―‘제주 덕후’ 고은영이 여기서 어떤 판을 바꾸고 있다고 생각해?
‘최초’의 수식어를 몇 개나 달고 있잖아. 게다가 백수에 비혼이야.
‘정치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 근본있는 자가 아닌거야 나는.
제주에도 소위 정치를 하려면 밟아야 하는 길이 있는데 난 그 조건과는 거리가 멀지. 여기서도 정치권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수십년 동안 바뀌지 않았어. 결국 기득권층 안에서 권력다툼이 있었을 뿐, ‘정치’는 부재했다고 봐. 이게 제주만의 문제일까? 내가 여기 와서 배운 건 ‘지역 감수성’이란 건데, 이 감수성에는 여성이나 미래 세대는 포함되지 않거든. 나는 그걸 깨고 싶은거야. 지역 정치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싶어. 근본없는 자로서.
‘50대, 고학력자, 남성’ 지금의 정치판에서 으레 통용되는 ‘정치인의 자격’이다. 선거 유세를 다닐 때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과연 나이나 학력이 ‘훌륭한 정치인’을 담보할 수 있을까? ‘30대 비혼 여성’ 고은영의 출마는 그 정치판에 들어설 자격을 다시 묻는 시도였다.
촬영·편집 황금비 기자
#2. 이 판에서 성공할 수 있을거라 착각했어―지금의 고은영을 만든 경험들이 궁금해. 구멍가게의 막내딸이었고, 1997년 아이엠에프(IMF)?를거치며 철거민의 삶을 살았다고 들었어.
20년을 한 동네에 살았는데, 중학교 때 재개발을 겪었어. 그 때 가난을 깨닫고, 친구를 잃었고, 무력감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 전학 온 친구들의 집에 놀러가면 아파트에, 엘리베이터에, 널찍하고, 크고, 따뜻하고…너무 좋은거야.
내가 가난한 걸 그 때 처음 알았어.
그 전에는 다 똑같이 가난했거든. ‘상대적인 박탈감’을 처음 느낀거지. 옛 친구들이 자꾸 떠나고 새 친구들이 계속 와. 집값이 올라 많은 세입자의 아이들은 더 가난한 동네로 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도시개발의 과정 속에서 아이로서 생존한다는 건, 내가 어느 위치인지 깨달아가는 거거든. 되게 가혹했지.”
그 때는 구체적으로 내가 뭐 때문에 불편한지 몰랐어. 지금은 알아. 재개발 인허가를 내준 권력층과 로비를 한 토건업자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아주 적은 보상을 위해 서로 싸웠고. 그걸 성인이 돼서야 안 거야. 얼마나 허무하고 무력해. 사실 되게 아픈 기억인데, 애써 묻어놨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이런 기억을 항상 떠올리며 살 수는 없잖아. 그러다 제주의 상황을 보면서 다시 꺼내게 된거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그래서 정치 하는 거고.
―사실 살다보면 대학을 가거나 취직을 하는 ‘전형적인’ 목표에 매몰되기 쉽잖아. 고은영이 무려 전국경제인연합회 인턴을 했다고 했을 때 놀랐어. 아니 이런? (웃음)
ㅎㅎ‘지금의 판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고민했고, 성공하고 싶었거든.
내 꿈은 ‘성공한 홍보대행사의 여자 사장’이 되는 거였어. 아주 능력있는 커리어우먼.
내가 겪은 상대적인 가난과 박탈감을 해소하려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가 아니라 ‘성공하겠다’를 택했던거야. 그래서 전경련 인턴도 했고, 수많은 소비재브랜드의 홍보도 했고, 심지어 도시개발사업도 했어. 홍보대행사에서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다가 결국 몸이 부서졌지ㅎㅎ
―10여년 전에 ‘알파걸’이란 개념이 나왔잖아. 마치 여성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말하는.
맞아. ‘알파걸’처럼, 일하는 여성들을 독려하는 장치들에 난 너∼무 공감이 가는거야. 내가 그렇게 살고 있었으니까!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어, 나를 잃어버리기 전까진.
하루에 네시간씩 자면서 4∼5년을 보냈고, 과거의 나와는 단절을 해야했어. 가난했던, 철거민 고은영을 없앴던거야. 정말 너무 큰 착각이었어. 나의 행복은 물론이고 내 눈에서 배제된 수많은 착취에 대한 고려를 하지 못했던 거지. 지금 서 있는 판을 바꾸지 않고선 그 수많은 ‘쥐어짬’들이 절대 바뀌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됐어.
―부조리를 인식한다 해도, 사실 삶의 방향을 갑자기 트는 건 어렵잖아. 결정적인 계기가 있어?
세월호지. 부조리의 총체. 기존의 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리고 그 판에서 성공하기 위해 달려왔던 이들이 만들어 낸 결과인데, 그걸 감당하는 건 정작 (이 판을 만드는데) 기여하지도 않은 아이들 수백명이었던 거야.
세월호 참사는 나를 완전히 바꿨어.
소위 ‘멘붕’이 왔어. 결국 세월호 가라앉고 반년도 안 돼 제주에 왔지.
―나도 비슷한데, 기자 되고 얼마 안 돼서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거든. 선배들은 ‘기자’로 생활한 세대지만 우리는 ‘기레기’에서 시작한 세대라고, 선배들한테 종종 얘기해. 나는 당신들과 다른 판에서 살고 그 판을 고민해야 한다고.
모든 영역에서 세대 간 충돌이 발생하고 있지 않을까. 이런 때 나는 (새로운 주체들에겐) ‘젠더’란 렌즈와 굉장히 다양한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걸 깨닫고 목소리를 내는 주체들이 확장되고 있다는 좋은 신호도 많이 느끼고. 그 신호의 한 사람인게 난 정말 행복해.
―맞아, 그 신호들을 보여주고 싶었어ㅎㅎ 아니 그래서 제주를 오긴 왔는데, 어쩌다가 ‘제주도지사 후보’가 돼버린거야?
세월호가 가라앉고 ‘서울’이란 판을 포기하고 선택한 곳이 제주야. 자연과 벗하며 살 수 있을 거란 환상이 있었어ㅎㅎ 사실 나뿐만이 아니야. 극심한 각자도생 사회를 이탈한 사람들이 제주에 많이 오거든. 제주 이주민을 보면, 압도적으로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 그나마 여기는 자연을 기반으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는거지. 그런데 정작 그 자산을 스스로 거세하고 있더라고. 비자림로 벌목 사태처럼.
서울이라는 판을 버렸는데, 제주도 다르지 않았던거야.
난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거든. 그럼 어떻게 하겠어. 바꿔야지. 한 번은 버렸지만, 이제는 바꿀 수밖에 없구나란 걸 깨달은 거지.
촬영·편집 황금비 기자
#3. 정치의 역할은 신호를 잘 포착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고은영을 말할 때 ‘제주 제2공항’을 빼고 말하긴 어렵다. 그의 캐치프레이즈는 ‘난개발 막는 여성 청년 후보’, ‘제2공항 막는 여성청년후보’였다. ‘트럭 사진’ 역시 유세 마지막 주 주말, 제2공항 부지인 성산에 가서 반대 연설을 하던 중 찍혔다. 제2공항 ‘재검토’ 입장을 밝혔던 유력 후보마저 추진하겠다고 입장을 바꾼 날, 그는 시내로 예정돼 있던 유세 일정을 바꿔 성산으로 향했다. 고은영은 ‘젠트리피케이션 이후의 젠트리피케이션’을 겪고 있는 월정리 해변의 예를 들었다. 바다가 오염된 월정리에서, 지난해 해녀들이 물질을 한 횟수는 딱 한 번이다.
―소위 ‘육지인’들은 사실 제2공항 문제가 왜 그렇게 절박한 문제인지 잘 몰라.정치의 역할은 신호를 잘 포착해야 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해.
그런데 제주가 보내오는 신호를 잡는 제주의 정치인이 없어. 제2공항은 재앙의 시작일 거라고 지금도 생각해. 그런 개발사업이 도민이나 후대의 행복을 보장할 순 없어. 제주에 약 70만명이 사는데, 연 방문자가 1500만명이 넘는대. 제2공항은 ‘3000만명 이상이 찾아올 것’이란 추정치에 근거한 사업이고, 갑작스런 발표에 도민들은 숙고할 시간도 없었어. 정치의 역할은 신호를 잘 포착해야 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해. 그런데 제주가 보내오는 신호를 잡는 제주의 정치인이 없어. 이런 압축적인 성장 속도에 도민들은 멀미가 날 정도라는데. 이 속도를 완화하겠다는 사람이, 5명 도지사 후보 중에 단 1명이었다는게 난 이 시대의 비극이라고 봐.
인터뷰를 한 지난달 27일 오전에도, 그는 제주도청 앞에서 ‘제2공항’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촬영 박다해 기자
―사실 나는 비례대표로 함께 출마한 아이 엄마와 성소수자 두 분도 인상깊었어. 아깝게 비례대표가 되지 못했지만, 좋은 성과를 냈잖아.
우린 ‘고은영의 캠프’가 아니라 통합캠프였어. ‘영혼을 팔아서라도 비례대표들은 도의회에 보낸다’는 전략이었지. (웃음) 비례대표가 될 수 있는 (득표율) 커트라인이 5%였는데 우리가 4.87%였단 말이야. 정말이지, 한 달동안 셋이 끌어안고 울었어. 비정규직·퀴어 노동자로 차별받다가 정치를 하게 된 김기홍, 두 딸의 아이 엄마로 경력단절을 겪고 힘들어하다가 정치를 택한 오수경. 각자 색깔은 다르지만, 세 명이 손을 잡고 앞으로도 계속 가고 싶어. 이런 정치적 동지를 얻은게 정말 큰 성과야.
―선거유세를 하러 다닐 땐 어땠어? 편견에 많이 부딪혔을 것 같은데.
‘세 번 나오면 뽑아준다’, ‘여자라서 못 뽑아주겠다’란 말을 종종 들었지. 남성 수행원들에게 남편이냐고 묻거나, ‘다른 후보의 딸이냐’고도 질문하고.
나는 ‘정치할 자격’에 대해 묻고 싶어.
그 자격은 결혼이 주나? 아니면 남편, 가족이 주나? 나는 1인가구, 비혼 여성이야. 내가 정치할 자격은 녹색당이 줬단 말이야. 내내 곱씹었어. 이런 질문을 4년 뒤, 8년 뒤에 다른 녹색당의 여성 후보들이 듣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음 사람이 그런 걸 겪게 하고 싶지 않고, 그게 내 역할이라고도 생각해. 정치할 자격에 대해서 논하는 판은 ‘미투’를 겪은 세대에겐 너무 소모적이야. 필요하지도 않고. 그걸 깨기 위한 실마리들을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많이 얻었던 것 같아.”
―이를테면 어떤 방식으로?
나 자체를 인정하는거지. 이렇게 얘기했어.
“저는 여자라서 잘 하는데요.” “이주민이니까 저는 구애받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다른 단면들에 대해서 인정하고 다른 방식으로 계속 대화를 했던 거지. 정치적 수사는 아니야. 이 판 안에서 내가 균열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나를 인정하고 극대화하는 전략이 필요했다고 생각해.
촬영·편집 황금비 기자
#4. 균열을 크게 키울 수많은 고은영들이 필요해
제주도청 앞 제2공항 반대 시위를 하는 천막촌엔 페미니즘 시민 천막과 여성 천막이 각각 설치돼 있다. “100명의 페미니스트가 하는 100가지 색깔의 페미니즘 정치가 필요하다”는 고은영의 바람과 닮았다. 정치판에서 젠더감수성을 가진다는 건, 제도 안에서 사라지거나 배제되는 주체가 없도록 만드는 일이다. 이 균열을 더 크게 키워 기존의 판을 깨부술 수많은 고은영들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들이 힘들지 않도록 고은영의 존재가 제주에서 자연스러워지는 것, 마침내 주체도 제도도 바꾸는 역할을 하는 것,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가 계속 하고 싶은 일이다.
제주도청 맞은편에 설치돼있는 페미니즘·여성 시민 천막. 고은영 제공
―고은영이 페미니스트임을 깨달은 순간이 언제야?
나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2018년 2월 1일이야. 시민경선을 통해 제주녹색당의 후보가 된 날. 서울에선 신지예란 후보가, 제주도에선 고은영이 나왔어. 이 둘을 ‘페미니스트 여성 청년’로 묶어 (당 차원에서) 모금 기획을 시작했지. 그 전까진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그 날 ‘아, 나도 페미니스트였지!’라고 깨달은 거야.
난 누군가의 호명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관련 책을 수십권씩 읽은 것도, 여성단체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지지자에 머문다고 스스로 규정했었던거야. 당사자로 호명이 된 순간 알아챘지. ‘맞아, 그게 나야.’ 호명을 꾸준히 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당신도, 또 다른 당신도 페미니스트라고.
―고은영의 페미니즘은 어떤 색깔을 지니고 있을까.
태도, 존중, 횡단. 나는 페미니즘이 내가 지향해야 할 삶의 태도라고 생각해. 그 태도 안에서 나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내가 존중 받길 원해. 그래서 함께 살아가길 바라. 횡단은 페미니즘이 할 수 있는 역할이지. 존중하고 상호 인정하는 가운데 사회를 가로지를 수 있는, 이러한 추동을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페미니즘에 있거든.
촬영·편집 황금비 기자
―여성은 ‘자유롭고 횡단할 수 있고 쟁취할 수 있는 존재’고 말해줬잖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줄래?
자유롭다는 건 나를 인정하고, 발굴하고, 주목하는 거지. 누군가의 시선이나 규범이 아닌 나 자신의 기준으로 정체화하는 것. 요즘 ‘탈코르셋’ 운동처럼 스스로에 대한 투쟁같아. 정말 응원해. 횡단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기 시작한 그 사람들이 약자와 연대하며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선까지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는 의미야. ‘페미니즘’이란 아주 강력한 도구를 갖게 된거지. 쟁취할 수 있다는 건 우리 자신에게 계속 걸어야 하는 주문이야. 정해진 성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성과를 내는 게 아니야. 내가 인정한 나의 모습에서 시작해야지.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더 넓게, 더 힘있게 횡단했으면 좋겠어.
여성이 주체가 돼 그 길을 만든다면 좋겠고.
―고은영의 올해 바람이 있다면?
제주 발전상에 대해 긴 호흡으로 연구하는 정책연구소 ‘고치클’을 6월에 열 예정이야. 전문가가 아닌 시민이 참여하는 플랫폼이 될 거야. 나는 지역 정당에서 함께 할 수 있는 파트너가 있으면 좋겠어. 수많은 여성 청년들이 정당이란 공적기관에서 ‘젠더’란 렌즈를 통해 지역을 바꾸는 작은 변화들을 지금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 어떻게 보면 완전 블루오션이지.
같이 합시다!
제주/취재=박다해 기자, 연출=황금비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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